[김인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에게 고견을 듣는다] "文정부, 無면허로 `국가주의 마약’에 취해 운전대 잡고 있는 상황”
디지털타임스 19년 12월 27일자 4-5면
자유·민주·시장경제 부정하는 생각 넘쳐… 北과 연합해 같은 나라 세우겠다니 세계 각국서 법인세 낮춰 기업 모시는데, 우리는 기업 쫓아내는 정책만 쏟아내 소득주도성장·주 52시간은 말도 안 되는 일… 공공개혁으로 정부 역할 바꿔야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前청와대 경제수석 (박동욱기자 fufus@)
개인의 경제적 자유가 제약되면서 한국경제는 촛불의 촛농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다. 극약처방 밖에 없다는 한탄이 나온다. 현재 '체제적 위기' 이전에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다. 성격이 조금씩 다르지만 위기를 극복하는 원리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달포 전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자 재단법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이 ‘명(明)과 암(暗) 50년-한국경제와 함께'라는 1000쪽 가까이 되는 1, 2권의 회고록을 냈다. 김 이사장은 외환위기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서 IMF구제금융을 준비한 위기상황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가 공직과 공인생활 50년의 개인사를 내게 된 계기는 경험을 공유해 한국경제와 한국사회가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리라는 소망 때문이다. 일종의 징비록(懲毖錄)인 셈이다.
김 이사장의 회고록이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경제부총리와 함께 '환란(換亂)의 주범'으로 몰려 무도한 음해와 매도를 당했으면서도 한국경제에 대한 무한의 애정을 품고 책을 내게 됐다는 점이다. 김 이사장과 강경식 당시 부총리는 검찰의 기소에 의해 진행된 재판에서 1심부터 3심까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만큼 원망도 컸을 테지만 속으로 삼켰다.
그러니 김 이사장으로서는 지금 한국경제가 처한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 강한 위기의식을 갖게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 이사장은 "외환위기라는 엄청난 사건에서 우리가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며 "해방 이후 한국이 공산화로 떨어지는 것을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를 채택한 것 자체가 기적인데, 지금 자유·민주·시장경제와 법치주의 이념을 부정하는 사상이 넘치고 지상 최악의 북한과 연합해 같은 나라를 세우겠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일갈했다. 김 이사장은 "특별한 변화가 없이는 구조적으로 고착돼 가는 이 흐름을 멈추게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며 "기적의 역사가 다시 한 번 이 땅에 이뤄지는 길 밖에 이 위기를 벗어나는 길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 시장경제연구원에서 지난 16일 가졌다. 마침 그 전 주말 정부의 고강도 부동산 규제책이 발표된 직후였는데, 김 이사장은 "국가가 시장에 지나치게 개입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국가주의' 발흥이 도를 넘었다”고 목청을 높였다. 김 이사장으로부터 위기로 치닫는 한국경제, 위기의 '원전'으로서 외환위기에서 배워야 할 교훈, 회고록에 얽힌 이야기에다 전문가 뺨치는 클래식 애호가로서의 활동 등을 들었다. 김 이사장에게는 특이한 이력이 있는데,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경력이다. 단 두 번의 지휘경력이지만 그의 지휘는 세간에 큰 화제를 뿌렸다. 정연한 논리로 무장된 정통 관료의 모습에 폭넓은 교양과 인간적 풍모가 물씬 풍기는 전인적 이미지가 두 시간 인터뷰 내내 짙게 배어나왔다.
-아무래도 회고록에 대해 먼저 여쭤야겠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관료 하신 분 중 회고록을 쓰신 분이 극히 적습니다. "우리나라에 회고록을 써가지고 주요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 회고록이 나온 후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는 것으로만 열 다섯 언론사에서 인터뷰나 기사로 나왔어요. 왜 그러면 언론이 관심을 표했겠는가 생각해봤어요.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외환위기라는 사건에 대해 나보다 더 중심이 있었던 사람이 없었고, 그 때문에 고초도 겪었고 그에 대해 키 플레이어 인물을 중심으로 사실을 기록하고 밝힌 경우가 전에는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1부에서 5부까지 묶은 1권과 달리 6부는 2권으로 외환위기 관련만 따로 떼어내었는데요.
"외환위기와 관련해 설명서나 분석서들은 많이 나왔어요. 나름대로 다 좋은 책들입니다. 그러나 딱 사람에 관한 얘기는 아무도 안 썼잖아요. 그런데 그걸 안 쓰고는 외환위기를 절대 이해를 못해요. 왜 외환위기가 왔느냐, 학문적으로 풀이해놓은 것 가지고 대한민국 외환위기를 절대 이해 못합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 관계를 모르고선 외환위기 절대 이해 못합니다. 또 DJ의 집권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점점 외환위기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외환위기를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책에도 쓰셨지만 정치적 이해타산 때문에 당시 경제팀이 내놓은 대책을 놓고 적시에 올바르게 결정을 못 내린 것 같아요.
"당시 문제가 많았지요. 하루 이틀에 생긴 문제가 아니잖아요. 축적돼온 문제가 왜 하필 그 때 터진 거냐,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때 안 터졌으면 그러면 그냥 넘어 가냐? 아니란 말이에요. DJ집권 기간에 터질지 누가 알겠어요. DJ는 어찌 보면 운이 좋았던 겁니다. DJ가 외환위기를 수습한 대통령이 됐지만 사실상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 만들어놓은 제도를 갖고 해결을 했어요. 금융개혁, 중앙은행제도, 금융감독제도, 신용보증 자산관리인제도, 예금보험제도 등 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제도 갖고 수습했어요. 그러고선 외환위기 주범이라며 우리(김 이사장과 강경식 당시 재경경제원 장관 겸 부총리)를 잡아넣었단 말이에요. 그게 우리나라 정치의 현주소고 수준이지요.”
-지금 우리경제가 외환위기와 또 다른 형태의 위기를 겪고 있는데요.
"그 때와 비교할 수가 없는 위기지요. 왜냐하면 그때는 충분히 극복 가능한 위기였고 또 실제로 극복했고요. 물론 DJ정부가 주장하는 극복이 나는 극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예컨대, 4대 부문 개혁을 했다고 했잖아요. 금융·노동·공공·기업(산업) 가운데 제일 먼저 기업 개혁했잖아요. 금융도 했지요. 그 다음 노동 개혁했나요? 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정부(공공) 개혁 무얼 했나요? 이 사람들이 공공개혁 했다는 게 무엇이냐면 공무원 숫자 줄이고 부처 통폐합 한 겁니다. 그건 개혁이 아닙니다. 부처 통폐합이 무슨 개혁입니까. 부처 오리엔테이션이 달라져야 개혁이지. 공무원 숫자, 제 얘기를 해서 안 됐지만, 철도청장(1994.8~1996.3) 할 때 철도청 직원이 3만8000명이었어요. 내가 이걸 3만2000명으로 줄이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줄이기 시작하다가 그만 두고 나왔는데, 그걸 최대의 업적으로 DJ정부가 내세웠어요. 한 번 자료 찾아보세요. DJ정부의 공무원 수 줄인 것은 내가 해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얼 바꾸려면 나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바뀌고 남보고 바뀌라고 해야지, 저는 안 바꾸면서 남보고 바꾸라면 되겠어요? 우리나라 개혁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정부 개혁을 먼저 해야 되는데, 안 된 겁니다. 시장과 관계에 있어서 시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시장에 맡기고 시장이 할 수 없는 일을 정부가 하는 것이 개혁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 한 게 하나도 없어요.”
-노동개혁도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노동 문제도 시장의 기능에 의해서 결정돼야 한다는 원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노동문제를 사회문제, 정치문제로 가져가지 말고 하나의 경제문제로 보는 시각으로 가져가야 하는 거예요. 노동시장에서 수요공급에 의해서 노동문제를 해결하는 구도로 바꾸는 것을 노동개혁의 본질로 삼아야 합니다. 정부개혁과 노동개혁을 잘 하면 나머지 두 개, 금융과 기업은 저절로 따라오게 돼있어요. 정부가 달라지고 노동개혁이 되면 금융과 기업은 하라고 안 해도 스스로 알아서 하게 돼있어요. 그런데 지금 뭘 했어요? 완전히 거꾸로 갔잖아요. 금융 통폐합하고 노동개혁은 노사정위원회 출범한 거 외에 또 무엇이 있나요? 사실상 DJ 이후에 IMF 위기를 겪으면서 그걸 통해 구조개혁과 생각의 변화 계기로 삼았더라면 '블레싱 인 디스가이즈'(blessing in disguise, 의도되지 않은 축복)가 됐을 겁니다. 그리 될 수 있는 조건이 그 당시 성숙돼 있었는데 하나도 살리지 못했다고 보는 겁니다.”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4대 부문 개혁은 한 번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십니까.
"오늘 신문 보니까 15억 원 이상 집에 대해서는 대출을 아예 안 해준다고 하는데, 그것을 왜 정부가 하라 하지마라 합니까. 금융회사가 알아서 판단할 사항이지 정부가 어떻게 일률적으로 대출 규제를 한단 말입니까. LTV(담보인정비율)를 얼마로 해라 하는 것이 이게 무슨 금융입니까, 금융사가 아니고 정부기관이지. 그러니까 금융산업이라는 게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제조업은 우리가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대한민국 금융은 세계에 나가면 명함도 못 내밉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학 나와 평균적으로 제일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가는 분야가 금융기관인데, 그런 사람들을 데려다가 제일 바보 같은 짓을 시키고 있으니. 왜 그럼 그렇게 되었냐면, 경쟁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게 통하느냐. 먹고 살만 하거든요. 못 먹고 살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뭐냐면 개방이지요. 문을 확 열어야지요. 나는 심지어 금융시장의 반은 해외에 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남아있는 반(국내 금융회사)이 지금보다 몇 배로 클 겁니다.”
-‘관치금융'이 여전합니다. 부동산, 금융 등 문재인 정부 들어 시장개입이 더 강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규제를 풀어 경쟁을 하게 만들면 시장은 커집니다. 우리 시장이 이게 자유시장입니까? 중국을 한 번 보세요. 시장경제를 도입했기 때문에 저렇게 성장한 거거든요. 다시 말해 사회주의국가라도 경제는 시장경제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요. 그런데 명색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나라가 시장경제를 제대로 운용하나요? 한국이 지금 시장경제국가입니까? 아니에요.”
-문재인 정부 들어 그 점을 더욱 체감하고 있습니다.
"법인세와 상속세에 대해서도 한 번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세요. 내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면, 그 때까지 세금 내고 남은 재산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내 자식에게 물려주려는데 거기에다 대고 또 50, 65% 세금을 내라고 하면 말이 됩니까? 돈 벌어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 본성이 뭐가 나쁘냐 말이에요. 그런 본성을 선하게 발휘되도록, 사회발전과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자유주의 사상의 기본입니다. 그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겁니다. 법인세도 마찬가집니다. 법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존재합니다, 법인의제설과 법인실재설. 법인실재설이란 법인이 자연인 같이 인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의제설은 결국은 법인의 권리와 이익이 자연인으로 최종 돌아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나는 법인의제설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예를 들어서 법인이 돈을 벌었다 해도 언젠가는 다 개인의 소득으로 치환되잖아요. 이자, 배당, 월급 등으로 가는 거고 재투자하면 결국 또 다른 개인한테 돌아가게 돼있는 거고. 그래서 법인의 이익이 개인의 것으로 치환되는 단계에서 과세를 하자는 게 내 생각이에요. 법인세를 어떻게 하면 낮춰서 기업을 끌어들일 것이냐 세계 각국이 지금 경쟁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전부 다 쫓아내는 정책을 쓰고 있단 말이지요. 그래놓고 무슨 경제를 한다는 겁니까. 경제의 기본은 생산이 이뤄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생산을 누가 합니까. 기업이 하는 건데, 이익이 나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익을 낼 수 있는 모든 구조를 다 폐지해놓고 기업들에게 투자하라고 하면 하겠습니까?”
-기업 생산여건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습니다.
"소득주도성장은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건 없습니다. 임금주도성장론이라고 웨이지 레드 그로스(wage-led growth)라는 게 있긴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경제가 침체돼 있을 때 잠깐 단기적으로 펌프에다 물을 붓듯이 임금을 일시적으로 높여서 임금소득자가 소비를 더하게 하자는 일시적으로 쓰는 정책입니다. 그게 정책의 기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가 어디 한 나라라도 있나요? 주52시간근로제도 주 48시간을 하든 52시간을 하든 근로자들이 일을 많이 하게 되는 게 사장이 일을 많이 시켜서만 하는 건 아니거든요. 일을 많이 한 만큼 돈을 더 받으니까 근로자들이 자청해서 하는 경우도 많아요. 일을 더 해서 집도 장만하고 애들 공부시키고 그러려니까 고생이 되더라도 일을 더 하려고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하지 말라는 겁니다. 본인이 알아서 하고 본인과 고용주간의 계약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이지, 국가가 하라 말라 안 해도 사람이 살기가 좋아지면 자연히 돈보다는 여가를 더 중시하는 쪽으로 가는 겁니다. 법으로 강제해서 되는 게 아니라 소득이 높아지니까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겁니다. 앞으론 언젠가 주4일 근무제로 갈 겁니다. 그것은 주4일만 일해도 먹고 살 수 있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시장에 맡기면 다 자연스럽게 되는 겁니다. 정부가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국가주의'에 중독돼 있는 거예요.”
-이사장님은 언제부터 시장주의자가 되셨나요.
"경제기획원 원가조사과장으로 일한 것이 시장주의가 되는 첫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경제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주요품목의 가격을 '원가+α(적정이윤)'를 기준으로 하룻밤 새 결정하면서 정부의 역할과 시장원리와의 괴리에 대해 갖게 된 회의로부터 시작됐다고 봅니다. 또 물가정책국장을 하면서 직접적 가격규제보다 거시안정정책에 의해 물가가 훨씬 더 안정되는 것을 경험했어요. 물가정책국장으로서 물가정책의 시장주도로의 전환을 이루는 배경이 되었고 그 결과 가장 안정된 물가수준을 시현할 수 있었습니다. 또 제 공직 대부분과 한 일의 대부분이 시장의 핵심적 요소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점도 특이합니다. 오랜 실무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시장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장'이라고 하면 반발심을 갖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문 정부 들어서 경제 관료들이 시장을 말하는 경우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시장이란 말만 나오면 ‘경끼'를 일으켜요.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시장?'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들도 시장의 기능을 알겁니다. 그런데 관료들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말을 못하는 겁니다. 그런 얘기를 하면 당장 집에 가야 하니까. 물론 개중에는 더러 자기 신념을 굽히며 출세 한 번 해보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없지 않겠지요. 그래서 나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건 없건, 불특정 다수의 현직 공직자들이 이 책을 읽어주기를 기대한다고 했어요. 그들도 관료로서 스스로 역할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 것인지 깊이 고민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해요. 주어진 여건 아래서 최소한도 시장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라는 메시지를 주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나의 경험과 생각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고 봤어요. 특히 책에서 시장이 실종된 이 시대에 나라경제를 다루고 있는 경제 분야 공직자들에게 '시장으로의 귀환' 없이는 한국경제의 장래는 없다고 믿는 나의 생각이 전달되기를 바랐어요.”
----------------------------------------------------------------------------------------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시장과 정책 조화시킨 경제관료‧‧‧공기업 체질개선에 주력
김인호 이사장은 시장과 정책을 조화시킨 성공적 경제관료로 평가받는다. 시장주의자이면서 원칙주의자다. 공직 30년 공인 20년, 50년의 개인사는 한국 근대화 산업화와 궤적을 같이 한다. 명과 암이 있었지만 향상(向上) 욕구가 충만한 시절이었다. 김 이사장의 경제관은 경쟁적 구조, 소비자주의, 국제화로 요약된다. 경제기획원 최장수 물가정책국장으로 시장원리에 입각한 물가정책으로 역사장 가장 안정된 물가수준을 달성했다. 소비자보호원장 시절에는 소비자중심 경제구조 구축에 매진했다. 철도청장 때는 고객중심 개념을 도입해 공기업 체질 개선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공정거래위원장 시절에는 상호채무보증제도 폐지, 내부거래규제 강화 등 공정경쟁 틀을 세웠다.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맡아 세계일류 '기업형 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한 역점사업을 추진했다. 시장경제연구원과 20년을 동행하면서 분쟁을 법적 경제적 다원적으로 접근해 합리적 처방을 도출하는 방법론을 개척했다. 지식과 논리로 무장된 정통 관료지만 문화예술의 여유를 즐기는 전인적 풍모가 두드러진다.
△1942년 9월 경남 진주 △1960년 경기고, 1966년 서울대 법대 행정학과, 1973년 미국 시라큐스대 행정학 석사, 경제학 석사과정 수료 △1966년 제4회 행정고시 재경직 합격 △1967년 1월 경제기획원 재경사무관 임관 △1985년 2월 同 물가정책국장, 1989년 5월 同 차관보, 1990년 4월 同 대외경제조정실장 △1992년 6월 환경처 차관 △1993년 4월 제4대 한국소비자보호원장 △1994년 8월 제19대 철도청장 △1996년 3월 장관급 초대 공정거래위원장 △1997년 2월 장관급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1999년 제3대 국가경영전략연구원(NSI) 원장 △2000년 10월 와이즈인포넷 회장 △2001년 4월 법무법인 세종 부설 시장경제연구원 운영위원장 △2004년 4월 중소기업연구원장 △2014년 10월 정부 중장기전략위원회 공동위원장 △2015년 2월 한국무역협회 회장 △2018년 5월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 헌창 △2019년 5월~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KCO) 후원회장
“나쁜 정치가 경제 지배하는 한 더 이상 경제발전은 불가능할 것”
前정부의 잘못 그 이상으로 되풀이하며 ‘적폐청산’외치는 모순 어디 있나 文정부서 하고 있는 것 전부 거꾸로 해야... 틀 바꾸지 않으면 소용 없어 지금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시장에 反하는 왜곡된 정책 양산하는 것 문제
김인호 이사장은 외환위기라는 값비싼 위기를 치르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은 그 후 들어선 DJ정부가 그 본질과 배경, 원인을 찾기 보다는 국민정서상 희생양을 찾아 국민들의 ‘분풀이'에 매달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이사장은 당시 경제팀이 입안한 IMF구제금융 계획에 따라 위기 대응에 나섰더라면 전국민에 크나큰 고통을 준 ‘경제위기'로 확산되지 않았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그 과정을 그는 데이터와 자료를 토대로 일목요연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경제위기로 비화하는 것을 막고 그 위기를 극복했다면 외환위기는 우리나라에 ‘블레싱 인 디스가이즈'(의도되지 않은 축복)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강조했다. 그리 안 된 가장 큰 책임은 정치라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적 목적으로 시장에 반하는 왜곡된 정책들을 양산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외환위기는 아직 진행 중이고 전 국민에게 심대하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는데 교훈을 얻는데 실패했다'고 하셨는데, 외환위기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지금까지 외환위기에 대해 분석한 책들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왜 왔느냐'하는 것을 규명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고 불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또 오더라도 꼭 그렇게 왔어야 했느냐,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는 통상적 외환위기가 아니고 경제전반의 위기로 왔단 말이에요. 그러면 왜 그렇게 됐느냐를 해명해야 하는 게 문제의 핵심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쓴 책이 없어요. 왜? 경제전반의 위기로 비화시킨 것이 DJ정부인데 자기가 자기 잘못을 고백하겠어요. DJ정부가 외환위기 극복대회까지 열었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문제인식이 외환위기가 왜 왔냐는 데서 출발해야 되거든요. 위기가 어떻게 진행되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조직이 어떻게 무슨 역할을 했어야 하는가 하는 어프로치를 하나도 하지 않았어요. '어떤 사람에 책임을 덮어씌우고 어떻게 하면 전 정부의 잘못으로 돌릴까' 하는 생각, '어떻게 하면 외환위기를 극복한 위대한 대통령으로 인식시킬까'하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봐요. 그러니까 값비싼 위기를 치르고도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겁니다.”
-외환위기는 왜 일어났습니까.
"한국경제가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주요 기업들의 부도가 잇따르는 가운데 동남아 금융위기가 진행되면서 한국경제에 대한 글로벌 우려가 커졌고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달러(외환) 부족'을 외환위기의 본질로 잘못 알고 있는데, 달러가 부족해서 위기가 온 것이 아니고 위기가 왔기 때문에 달러가 빠져나간 겁니다. 달러가 빠져나간 것은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고요.”
-당시 물론 누적된 문제가 있었지만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면 국제수지, 물가, 성장률 등 기초경제여건(펀더멘털스)는 괜찮았고 정부재정도 건전했는데, 일반 국민은 아직도 ‘국가가 부도가 난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당시 나라 빚은 20억~30억 달러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빚은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빚이었어요. 홍콩 증시가 폭락하고 대만이 환율 방어를 포기하자 이제는 우리 차례라는 위기감이 엄습해오면서 위기 대응을 더욱 조였어요. 우리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해외차입이 어렵게 되고 단기 외채 상환이 도래하면서 한국은행 보유외환이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무디스와 S&P 등 국제신용평가사들이 수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 신용등급을 낮췄어요. 한은이 최종 대부자(lender of the last resort)로서 보유외환을 풀어 구제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영화가 있다고 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당시 11월 16일 캉드쉬 IMF 총재가 극비 방한해 심야에 IMF구제금융을 받기로 합의하고 그대로 시행이 됐더라면 지금도 논란이 되는, 한국경제 실정에 맞지 않는 초고금리정책과 초긴축재정정책이라는 거시경제운용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됐더라면 우리나라에 ‘블레싱 인 디스가이즈'가 될 수 있었지요. 우리 힘으로 하기 어려운 것을 IMF의 힘을 빌려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두 번째로는 그동안 축적된 모든 문제점들을 다 들어낼 수 있는 기회였거든요. 박정희 대통령 이래 축적된 경제운용 방식으로는 이제 한국경제가 운영되기에는 너무 커버린 겁니다. 11월 14일 김영삼 대통령께 IMF 구제금융을 받는 것을 승인받고 즉시 태국에 포럼 참석차 가있는 캉드쉬 IMF총재를 극비리에 서울로 오게 해 논의했어요. 강경식 부총리와 한은 이경식 총재를 만난 캉드쉬 총재는 당시 강경식 부총리와 내가 추진하는 금융개혁법안의 국회통과가 매우 중요하고 대통령당선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대통령후보자(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로 확대되었지요. 회담은 성공적이었어요. 캉드쉬 총리는 금융개혁법안 등 정부의 대책을 듣고는‘바로 이거다'라며 흡족해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흘 뒤 19일 개각이 이뤄지고 우리가 물러나게 되면서 헝클어졌습니다. 신임 임창열 부총리가 취임 기자회견에서 IMF로 가기로 한 것을 부인했어요. 그 이틀 후 21일 다시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다는 발표를 하는 등 해프닝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강 부총리와 제가 역점을 두고 추진한 금융시스템의 신뢰를 높이기 위한 금융개혁법안의 국회통과가 무산됐습니다. 당시 국제사회는 한국 정부의 문제 해결의지와 능력을 가늠할 가장 좋은‘징표'로서 금융개혁법안 통과를 지켜봤었습니다.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IMF와 재협상을 추진한다고 하면서도 엄청난 혼선이 빚어졌습니다.”
-왜 금융개혁법안이 처리되지 못했나요.
"금융노조 등 이해집단의 반발로 당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당과 야당 모두 선뜻 법을 통과시키려 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DJ도 정부안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김원길 의원(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이 나한테 뭐라고 했냐면 '선생님(DJ)이 이 정도면 우리가 받아야지'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금융노조가 반대를 하니까 뒤로 빠졌습니다. 당시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간 당락이 30만표 차이로 나뉠 거라는 전망이 있었어요. 태도를 싹 바꾼 겁니다. 심지어 ‘우리는 국회에 가서 막지는 않을 테니 통과시키려면 여당이 단독으로 처리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여당 단독으로 하면 되는 건데, 여당은 ‘너희만 노조 표 얻으려 하냐? 너희가 안 하면 우리도 안 해'라는 생각을 한 거지요. 뒷날 나와 강 부총리에 대해 '왜 강력한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미리 시행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는데, 구구하게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정권 말기 대통령 권력누수가 본격화하는 상황에서 적절치 않다는 지적에도 무릅쓰고 금융개혁법안을 밀어붙인 것은 한국경제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인 금융을 개혁하지 않고는 더 이상 다른 부분의 개혁이 어렵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외환위기 이전부터 공개적으로 누누이 강조해왔어요.”
-정치 리스크가 한국경제를 궁지로 몰아간 셈입니다.
"대통령 경제수석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합리적 제안일지라도 최종적으로는 정치적 고려와 정치적 판단에 따라 수용여부가 결정되는 현실에 직면할 때가 많았어요. 막중한 경제현안을 국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악용하는 것을 적잖게 보았습니다. 국가적 현안인 IMF행조차도 재협상론을 제기하는 등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DJ를 보면서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는 한국의 현실을 직감했어요.”
-그 때와 비교해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런 현상은 정권이 거듭되면서 오히려 심화됐다고 생각해요. 급기야 문재인 정부에 이르러서는 절정에 도달한 느낌입니다. 전 정부가 한 일을 모두 '적폐'로 몰아 없애거나 범죄시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과거 정권이 보인 나쁜 행태 그 이상으로 되풀이하면서 '적폐청산'을 외치니 이런 모순이 어딨습니까?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 클린턴 후보가 국민들 마음을 사기 위한 구호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고 했잖아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다릅니다. '문제는 정치야, 바보야'라고 해야 맞아요. 나쁜 정치가 경제를 지배하는 한 한국경제 발전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 당시 금융이 부실화된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때까지 한국경제는 고성장을 계속 해왔어요. 그에 따라 기업들도 차입을 바탕으로 고확장 경영을 하면서 규모를 키우려고 했어요. 그 사이에 끼인 게 금융이란 말이에요. 금융은 계속 자금을 대야 하고요. 그러니 금융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는 거지. 그런데 그 전까지는 개방이 크게 안 돼 있었기 때문에 국내 재원만 갖고 금융을 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안 됐어요. 그러나 이제 개방이 돼 해외자금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컨트롤을 할 수 없게 된 거예요. 그래서 터진 게 외환위기입니다. 그래서 뭐가 급선무인가 생각했냐면 첫째 금융을 바로잡아야 되겠다는 거였습니다. 과거 정부정책의 수단으로 봤던 데서 시장에 의해서 움직이는 금융으로, 금융이 독자적인 금융산업으로서 시장 기능을 활성화해야겠다고 방향을 정한 거지요. 금융개혁이 이뤄지면 그 다음부터 기업부실을 해결하려고 했던 겁니다.”
-대책을 준비했던 경제팀이 IMF와 계속 협의하며 대응했더라면 '외환의 부족'이 '전면적 경제 위기'로 파급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강 부총리와 내가 대통령에게 IMF로 가는 것으로 하고 국회 통과가 안 된 금융개혁법안만 제외하고 모든 대책을 다 보고하고 마련해 놓았어요. 11월 19일 강 부총리와 내가 그만 두지 않았더라도 당시 경제팀을 갈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책에서 제 양심과 기억에 의존해 쓴다고 했는데, 특정인을 비난할 생각이 없어요. 임창열 부총리는 개인적으로 후배고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비난해봤자 얻을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러나 역사를 위해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IMF로 가는데 캉드쉬 총재와 두 가지 전제를 달았어요. 첫째,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둘째, 대통령 당선자도 이 결정에 동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다 합의를 보고 대통령 재가를 얻은 다음 발표를 하려고 했는데, 개각으로 우리가 못한 거지요. 저는 김영삼 대통령이 개각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가 세운 대책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책을 새 경제팀에 넘기라고 했으면 되는 거였어요. 그렇지 않으면 대책을 만들고 IMF와 협상을 한 팀에게 대책을 발표토록 해야지 사리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어요. 그 과정을 이번에 책에 자세히 썼습니다. 협상 주역과 정치권이 IMF로부터 신뢰를 잃음으로써 외국 투자가들의 한국에 대한 불신이 가중됐어요. 외국의 경우 IMF행이 결정되면 안정을 되찾는데 오히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가 심화됐습니다.”
-외환위기 이듬해 겪지 말아야 할 고초를 겪으셨는데, 당시 DJ정부가 국민의 상심에 대한 출구로 ‘희생양'을 찾은 게 아닌가요.
"책임규명이란 명목으로 검찰이 저와 강경식 부총리를 기소했습니다. 1심부터 3심까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어요. 1999년 1월부터 최종적으로 국가로부터 형사보상까지 받은 2003년 3월 31일까지 무려 8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일어난 내 일생에 둘도 없이 큰 의미의 사건입니다. IMF 외환위기를 겪은 세계 어떤 나라도 정책적 판단에 대한 형사 처벌을 시도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대중 정부와 검찰이 무리한 형사사건화 한 것은 아주 잘못된 겁니다. 그들은 심지어 우리 둘을 '환란'(換亂)이란 말을 만들어 그 주범으로 몰고 갔습니다.”
-재판을 받으면서 또 그 이후에도 외환위기에 대한 정확하고 냉정하게 설명하고 분석한 기고와 책, 강연을 많이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 개인 홈페이지(www.ihkim.org)에도 자료를 다 올려놨습니다만, 우리나라 뿐 아니라 아시아 외환위기 전부를 다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놓았어요. 또 기회 닿을 때마다 강연과 기고에 나섰습니다. 외환위기에 대한 국민의 잘못된 인식을 설명하는 글을 '월간조선' 2001년 10월에 기고한 글이 있습니다. ‘외환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 10가지 오해에 답한다'라는 제목으로 원고지 200매 분량의 장문의 기고입니다. 외환위기와 관련해 국민, 정치인, 정당, 언론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으려고 근거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글입니다. 당시 DJ정부 초기였는데, 편집자가 보더니 'DJ 쪽에서 가만히 안 있을 텐데요' 그러는 겁니다. '그러라고 쓴 거다'고 했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학자든, 정치인이든, 청와대 주변의 관료든 내가 쓴 것에 이의가 있는 사람은 나하고 TV에 나와 공개토론하자고 제안했어요. 괜히 딴 소리할 요령 못 피우게 생방송으로 TV 토론을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한 사람도 문제제기한 사람이 없어요. 이건 나라가 아닙니다. 자기들 대통령이 최고의 치적이라고 하는 IMF극복에 대해서 '위기 자체 해석을 잘못 하고 있고 원인도 잘못 짚고 있으며 그동안 처리과정도 도대체 되어먹지 않았다'는 주장을, 또 'IMF 극복했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고 했는데 그러면 대통령 참모나 관리 중에 누구라도 반박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회고록 출간 후 이의제기를 받은 적 있나요?
"책 낸 지 달포가 좀 지났는데, 아직은 없어요. 모르겠어요, 앞으로 나올지는. 나는 내가 틀렸다면 좀 지적해줬으면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책에 거명된 인물이 800명 가량이고 집중 거명된 사람이 12명(그룹 포함)과 또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 중 구존한 분들은 책을 당연히 봤지 않겠어요? 거론한 사람은 다 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모셨던 대통령이지만 YS에 대해서도 잘못한 거에 대해서는 다 지적했습니다. DJ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그 분들이 잘한 것도 많죠. YS는 하나회 척결했다든가 금융실명제 했다든가…. 하지만 내가 언급할 사안이 아니고 내가 청와대에 있는 동안에 있었던 일도 아니기 때문에 굳이 이야길 계제가 아니지요. 나는 사실대로 썼으니까 언제든지 반론에 대해 설명할 생각이 있습니다. 회고록이라는 게 모여서 역사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 거짓으로 쓰면 금방 탄로나니까 거짓말을 쓸 순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쓰지도 않고 반론도 없는 겁니다. 내가 이걸 쓴 걸 계기로 해서 회고록을 쓰는 사람들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적어도 정부 주요한 직책이나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은 회고록 하나는 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회고록에 대해 좀 더 여쭙겠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쓰셨나요.
"이건 제 자랑으로 듣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이번 회고록으로 나는 우리나라 회고록 문화를 바꿨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회고록을 쓰면 자기밖에 읽지 않는 책이다'라는 말이 있었어요. 자기만족, 자기자랑을 위해서 쓰는 책으로 치부된 거지요. 남들은 그냥 받았다는 걸로 읽지도 않고 밀어놓는 것이 거의 70~80%의 진실일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에 공감할 겁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됐냐.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첫째 자기가 안 썼단 말입니다. 대개는 작가가 씁니다. 회고록을 쓰려면 나이가 어지간히 되고 사회에서 경륜이 쌓여 원로라는 할 만한 경지에서 써야지 젊은 사람이 회고록을 쓰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건방지다고 하지 않겠어요? 그 나이 쯤 되면 글쓰기가 어려워집니다. 설사 기록을 가진 사람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학자들은 모르겠지만 관료라든가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작가를 통해서 쓰게 됩니다. 글이란 자기가 쓰지 않는 것은 생명력이 없어요, 아무리 훌륭한 작가가 쓴다고 해도. 직접 쓴 글하고 남이 쓴 글을 읽어보면 첫 페이지만 보면 표가 납니다. 두 번째는 나름대로 진실을 쓰겠다고 하겠지만 사람에 관한 것은 다 빼고 씁니다.”
-회고록 문화가 성숙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우리나라에 ‘기록을 남기면 손해다'라는 생각이 특히 정계와 관계에 뿌리박혀 있어요. 기록을 남기게 되면 특히 우리나라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람을 떼거리로 감옥 보내고 욕을 보이는 사회에서는 기록을 보유하는 것 자체도 위험해요. 내가 이번에 회고록을 쓰면서 과거의 부하 중에서 유능하고 자료도 많이 가지고 있을 것 같고 또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있어 참고하기 위해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나한테 빌려줬으면 좋겠다. 내가 참고하고 돌려주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사실은 다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정권 바뀌면서 싹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게 현실입니다.”
-문재인 정권의 소위 ‘적폐청산' 때문인가요?
"사람에 관한 얘기가 좋은 얘기도 있고 나쁜 얘기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실대로 안 쓰게 되면, 역사적으로 사료로서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사람의 얘기를 다 빼고 굳이 쓴다면 좋은 이야기만 쓰는 거야, 덕담만 쓰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볼 때,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에 대해 썼는데 좋은 점이 있지만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모셨던 상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지 않겠어요? 정책 결정과정에서 문제점은 하나도 안 쓰고 좋은 이야기만 써놓으니까 일반 사람들이 전연 감동을 못 느낀다는 겁니다. 사실이 아닌 회고록이 돼버리지요.”
-어떤 회고록이 역사적 가치가 있습니까.
"도대체 회고록을 왜 쓰느냐? 개인으로 봐선 자기 삶을 정리한다는 의미가 있지요, 이리 저리 해서 출세해서 살고 있다, ‘쏘왓?'(So What?)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지요. 적어도 세상에 책을 내놓으려면 메시지가 있어야지요. 메시지가 있으려면 콘텐츠가 있는 삶을 살아왔어야 합니다. 그가 아니면 생각하거나 할 수 없었던 어떤 활동, 행태 이런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나라에는 회고록 문화가 빈약합니다. 적어도 주요 공직에 있었던 사람들은 회고록을 쓰는 것이 특권이고 의무거든요. 그걸 통해서 역사에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을 다 밝힌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청와대에서 대통령 모시고 일할 때 가령 대부분의 의사결정과정에서는 대통령과 나하고 둘 밖에 없어요. 딱 둘이 앉아서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도 그걸 기록하는 사람이 없어요. 딱 둘만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모든 정책결정에 있어서 한 80%의 중요성을 갖는 거거든요. 부처간 협의를 하고 차관회의와 국무회의를 거치고 경우에 따라 국회로 가고 하는 것들이 있지만, 그 전에 대통령과 이야기한 것, 그것이 사실상 정책 결정에 있어서 핵심적 내용이고 과정인데 회고록에 쓰지 않으면 그것에 대한 어떤 기록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에요.”
-조선시대 같으면 왕과 신료간 대화를 사관이 사초로 기록을 했잖아요.
"그렇죠. 조선실록을 보면 왕이 독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반드시 사관이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적습니다. 심지어 왕이 기침하는 거, 왕의 표정이 뭐 나빴느냐 좋았느냐 다 적었잖아요. 우리나라 조선실록은 기록문화의 세계적인 유산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때보다 훨씬 후퇴한 나라가 된 겁니다.”
-공적 활동과 관련 있는 사적인 활동까지 꼼꼼히 기록해 놓은 부분에도 눈길이 많이 갑니다.
"서문에서 회고록을 쓴 배경을 이야기했지요, 제일 고민했던 것이 사람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또 무엇을 키 메시지로 해서 회고록을 쓸 것이냐는 것이었어요. 제4부가 핵심이에요. 제4부를 중간에 놓고 1·2·3부는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살아온 길을 썼어요. 걸어온 길뿐 아니고 이러이러한 배경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밝혔어요. 가정적 배경과 조직에서 일하면서 있었던 배경 그런 걸 5부에서 쓴 겁니다. 6부는 외환위기의 원인과 배경에 대해 쓴 거고. 4부는 공인생활 50년의 결산으로, 바쁜 분들은 이것만 읽어도 됩니다.(기자가 책을 막상 집으면 이상하게 빨려들어가 빨리 읽힌다며, 5·6부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자 김 이사장은 유쾌하게 크게 웃었다) 4부만 읽어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는 크게 부족함이 없을 거로 봅니다. 그 다음에 덧붙이자면 5부도 꼭 필요합니다. 사람은 저절로 형성되는 게 아니잖아요. 많은 사람들과의 접촉, 교육, 가정적 배경, 사람들과의 교류 이런 걸 통해서 형성이 되는 거란 말이지요.”
-무역협회장을 하시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2015년 2월 중순 무역협회 회장을 맡아달라는 전혀 생각지 않는 제안을 정부로부터 받았어요. 아시다시피 무역협회는 경제주요단체고 대기업도 회원으로 있지만 주로 중소 무역인 7만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협회예요. 그 전에 중소기업연구원장을 했고 경제기획원에서 대외경제조정실장을 했으니 저와 전연 연이 닿지 않는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무역협회 회장 자리는 제도상 회장 선출에 정부가 간여할 근거는 없지만 과거로부터 협회가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활동해왔기 때문에 정부가 사실상 추천을 하고 협회 정관에 따라 선출을 합니다. 역대 회장은 명실상부 우리나라 장관급 이상의 경제 관료를 대표하는 분들이었어요. 전임 한덕수 총리도 그렇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태에서 회장 제의를 받아 처음에는 할 마음이 없다고 사양했어요. 그런데 정부 뜻을 전해온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무역협회장이 어떤 자리인 줄 알고 그 자리를 사양하려고 하느냐' 반문하는 거예요. 물론 그 자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요. ‘이미 나이도 많을뿐더러 내가 중심이 되어 만든 시장경제연구원이라는 민간연구소 운영에 충실하고 싶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겸직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계속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어서 맡게 됐습니다. 다행히 협회에서도 만장일치로 저를 환영해줬고요. 박근혜 전 대통령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었습니다. 다만 캠프에 있는 후배들이 좀 도와 달라 해서‘내가 표를 얻는데 도와줄 길은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다'고 하면서 ‘당선되고 나서 나라 경제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이냐를 고민해야 한다'고 하면서 경제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일을 해주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후보 시절 새 정부가 참고해야 할 경제정책의 큰 방향을 제시하는 '새로운 경제정책 방향의 모색'이라는 제목의 연구자료를 만들어 전달한 적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참고를 했느냐 하면, 별로 참고를 안 한 것 같아요.”
-제시하신 방향이 참고가 됐더라면 개혁에 발동이 좀 더 세게 걸렸지 않았을까요.
"대통령이 경제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전문지식은 없더라도.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정도로 느껴야 되는데, 미안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그 정도는 안 돼요. 힘들게 만든 것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었어요. 정부 중장기전략위원회가 있었어요. 후배 부총리와 공동위원장을 했는데, ‘중장기 전략은 딱 한 페이지면 된다. 한국경제가 살아가려면 크리티컬 패스가 뭐냐, 거기 뒷받침 되는 게 뭐냐 그것만 제시하는 게 전략이지 무슨 5개년 계획같이 책을 두껍게 내는 게 전략이 아니다' 그랬지요. 그런데 내 생각이 안 받아졌어요. 5개년 계획과 비슷한 것을 내놓고 끝냈어요.”
-책에 보면 시장경제연구원의 연구 활성화가 어렵겠다고 판단했다고 하셨는데요….
"나는 정부직을 그만두면서 정부의 영향력 하에 있는 일은 일체 하지 않는다고 딱 선언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좀 교만한 생각이지만 ‘내가 연구소를 해서 내 힘으로 벌어먹고 산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한 번도 연구소를 떠나 산 적이 없습니다. 시장경제연구원(MERI)은 2001년 법무법인 세종의 설립자이자 대표변호사인 신영무씨와 상의해 만들었어요. 세종이 필요로 하는 주요 법적 사안과 관련해 경제적인 분석을 제공함으로써 서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설립했어요. 그 후 2005년 11월 세종과 별도로 독립 재단법인으로 재출범하면서 이사장을 맡게 된 거지요. 이사장이자 선임연구위원으로 일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무역협회장 임기를 석달 남겨 놓고 타의로 사임하는 과정에서 나와 정부간 경제철학이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어요. 또 이를 대외적으로 분명히 밝혔고요. 그러다보니 접촉하는 사람마다 연구원 활동에 참여하거나 도움을 주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민간연구소에 연구 출연을 하면서도 정부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부닥친 거지요.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괄목한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면서도 전반적 체제와 법적 측면, 사회제도, 사회의 인식, 정부 권한의 적정한 행사 등 측면에서는 아직 엄청난 후진적 요소가 남아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임기 절반을 돌았는데요, 앞으로는 달라질까요.
"나는 지금 정부가 하고 있는 것을 전부 거꾸로 하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180도 뒤로 돌아가면 되는 거예요. 하나도 지금 제대로 가는 게 없다는 게 제 생각이고 그걸 하나 하나 지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틀을 바꾸지 않는 한 소용이 없다 생각해요. 그래서 내가 전에 다른 언론과 인터뷰할 때 그랬어요. 무면허 운전자가 술을 잔뜩 먹고 ‘국가주의'라는 ‘마약'에 취해 운전대 잡고 막 폭주를 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너 왜 신호를 안 지키냐, 왜 정규 속도를 안 지키냐, 왜 좌회전해야 되는데 우회전 하냐, 우회전 하는데 좌회전 하냐, 목적지가 어디냐'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사장님 회고록을 읽고 잘못 가고 있는 정부를 돌려세우는데 힘을 모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나는 소망이 있다면, 이 책이 팔리면 인세가 얼마나 돌아오겠어요. 나한테 인세 안 줘도 좋으니까 적어도 한국의 경제 분야 주요 현직 공무원, 나 같은 퇴직공무원, 공적 관심을 갖고 일하겠다는 정치인들, 공적인 활동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에요. 공무원을 준비하는 공시족들도 책을 한 번 읽어봤으면 해요. 위원장 했던 공정거래위원회에는 위원장과 과장급 이상 주요 보직자들에게 내 돈 들여서 한 권씩 보내줬어요. 그런데 책을 보내줬으면 참고하겠다고 하는 간단한 회신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걸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참 이상한 사회가 됐어요.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 인간성 이런 것들이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사회가 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균형감․평정심, 클래식 음악서 찾아”
전문가 수준 애호가... 오케스트라 지휘도
김 이사장은 '영원한 시장주의자'로 불리는 한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시장주의자'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그의 클래식 이해와 감상의 수준은 단순 딜레탕트를 넘어선다. 우리나라 최고의 심포니오케스트라인 KBS교향악단과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적도 있다. 정식 연주회서다.
"저는 환경부 차관 시절 1년 치 티켓을 미리 구매하는 KBS교향악단 연간 회원이 됐어요. KBS교향악단이 2014년 경 난맥상을 보일 때까지 20년간 회원이었습니다. 2000년 연말 KBS교향악단에서 매월 발간하는 소식지와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교향악단을 한 번 지휘하고 싶다'는 말을 하게 됐어요. 농담처럼 했는데, 2001년 신년 어느 날 KBS교향악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연회원을 위한 신년특별음악회'에서 아마추어가 지휘를 하는 이벤트성 행사를 마련했는데, 해볼 용의가 있느냐는 거예요. 나는 농담으로 한 얘기라며 펄쩍 뛰었지요. 거듭된 요청에 집사람과 상의해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김 이사장이 부인을 끌어들여 사양하려 한 것은 지휘 실력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들을 때면 음악에 심취돼 손이나 나무젓가락을 갖고 지휘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 취미인데 그것을 부인이 늘 보아 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당신이 제정신이냐. 아마추어가 우리나라 최고의 교향악단을 지휘한다니 말이 되느냐'는 거예요. 다음날 전화를 걸어 못한다고 했지요. 그런데도 KBS에서 부득부득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게 됐어요, '에라 한번 해보자, 죽기야 하겠냐'하는 심정으로.(웃음)”
당시는 외환위기 재판에서도 1심에서 무죄를 받아 홀가분한 마음으로 지휘를 했다고 한다. 언론에 보도되면서 화제가 된 것은 물론이다.
"당시 선곡한 것은 멜로디가 완전히 머리에 입력돼 있고 비교적 자신이 있는 차이콥스키의 ‘슬라브행진곡'이었어요. 풀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전형적인 단악장의 관현악곡입니다. 그 당시 ‘경제수석의 화려한 외도' ‘경제수석, 오케스트라의 포디움에 서다' 등 언론 관심도 상당했지요.”
그 후 무역협회장을 할 때 2016년 무역협회 창립70주년 기념연주회에서 직원들의 요청이 있어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 때는 ‘슬라브행진곡'과 바그너 악극 ‘로엔그린' 3막 전주곡 두 곡을 지휘했습니다.”
"제가 지휘한 날 KBS심포니 역사상 실내에서 한 것으로는 객석이 가장 많이 찼다고 들었어요. 객석 뿐 아니라 2층에는 복도에 다 앉아야 할 정도였으니까. 세계 어떤 유명한 지휘자가 왔을 때보다도 많았다고 해요. 그 때 내가 좀 유명했거든. DJ정부에서 나를 ‘환란주범'으로 지목해 신문에서 대서특필 했거든요.(웃음)”
김 이사장은 "자기 분야 외에 좋아하는 문화나 예술에 관심을 갖고 즐기면 균형적 사고와 관조적 태도를 갖게 되지 않나 싶어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각박하고 살벌합니까?”라며 "특히 일에 파묻혀 사는 공직자들이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하는 방법을 갖는 것이 공직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권고했다.
김 이사장은 올 들어 새로운 직함을 하나 더 갖게 됐다. 실내오케스트라로서는 국내 최고 수준인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KCO)의 후원회장이 된 것. ‘후원회장이라는 게 돈이 있어가지고 돈 좀 내놓고 남들에게 후원 좀 하라고 해야 할 텐데, 내가 공직에서 월급생활만 한 사람이 어떻게 후원회장을 할 수 있겠냐'고 사양을 했더니 자꾸 하라고 해서 이름은 걸어놓겠다고 했지만 일단 맡은 이상 어떻게 도움이 될까 고심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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