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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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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터뷰]역사적 책임을 감당하는 뿌리 깊은 신앙
주관기관/행사명   숲과나무 발행일자   2001/06/01 조회수   0
  여기 이 사람 - 와이즈인포넷 회장 김인호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는 급격한 변화 속에서 많은 진통을 겪었다. 사실 한국 사회는 최근뿐만 아니라 지난 몇 십년 동안 성장통이 느껴질 만큼 많은 변화를 감내해야만 했다. 이번 호에는 이 변화의 흐름에 정통 관료로서 경제 정책의 중심에 서 있었던 김인호 집사(와이즈인포넷 회장, 전 청와대 경제수석, 새문안교회)를 만나 보았다.

지난 30여 년간 재직하던 공직을 사임하고 지금은 고급정보 및 지식컨텐츠 제공업체인 (주)와이즈인포넷의 회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그는 얼마 전 아마추어 음악애호가로서는 처음으로 KBS 교향악단을 지휘해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였는지 만나본 그의 모습에서는 정통 관료로서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그는 집안이 어떻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희 집안은 경상도에서 개신교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 집안입니다. 제 고향이 경남 밀양인데 저희 증조할머니께서 기독교를 받아들이셨어요. 그 당시로는 상당히 외진 곳인 밀양까지 어떻게 기독교가 들어왔는지 의아스럽지만 덕분에 저희 집안 어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이렇게 해서 저희 집안은 예수를 믿는 집안이 되었고 제가 4대째죠."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인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대에서 경상도 지역에서 최초로 목사가 나올 정도로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경남의 김응진 목사가 바로 그분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의 부친 역시 목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 부친이 연세가 많지만 조금 늦게 공부를 시작하셨어요. 김영환 목사신데 한경직 목사 같은 분이 동년배이셨어요.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를 마친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셨죠. 해방 이전에는 경상도 여러 지역에서 목회를 하셨고, 해방 이후에는 목회보다는 기독교 농촌운동을 다양하게 하셨죠."

기독교 농촌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를 받는 그의 부친은 농촌의 근대화를 위한 지도자 교육, 특히 교회를 중심으로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각종 교육·훈련 잡지 발간 등 각종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고 한다.

"제 부친이 하신 일 가운데 세 가지는 역사에 남을 만한 일입니다. 첫째는 한국 전쟁 이후 많은 상이군인들이 발생했는데, 이들에 대한 신앙 교육 및 귀향(歸鄕) 이후의 재활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셨어요. 그래서 민간인으로서 군복을 입고 전도를 하기 시작했지요. 이게 바로 우리나라 군목제도의 효시로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데 농촌지도자들의 체계적인 양성을 위한 '새나라 건설대'라는 조직을 만들고 농촌 개량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 이후 전개된 새마을 운동의 효시가 된다고 봅니다. 셋째는 농촌부흥의 모델인 덴마크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겠다는 필요를 느끼고 한·덴마크협회를 만들었어요. 이는 민간으로서는 첫 외교협회였습니다.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의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되 초교파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이죠."

그는 이렇게 사회 참여적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교회가 개교회에 얽매이기보다는 통합적 활동을 해야된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고, 기독교가 사회문제에 좀 더 깊이 있게 참여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신앙적 배경을 가진 그가 공직생활을 하게 된 것이 궁금했다.

"제가 공직생활을 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당시 흔치 않은 여성공무원이셨는데 경남에서 여성으로는 가장 높은 직급에 계셨어요. 경남도청의 부녀계장으로서 한국전쟁으로 대두된 여성문제에 책임을 지고 계셨는데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공직을 택한 데에도 영향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던 1966년, 행정고시 4회에 합격했다. 선택한 분야는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재경직이었다.

"법과대학을 진학하긴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경제학에 흥미가 더 있었어요. 법률에 관한 책을 볼 때의 느낌하고 경제학 관련 책을 볼 때의 느낌이 달랐어요. 그래서 경제분야를 선택하게 되었고, 이후로 지금까지 35-36년 동안을 경제분야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전공은 법이었지만 경제분야에서 일생을 보낸 셈이죠."

이렇게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경제 발전단계에 돌입한 한국경제의 성장과 함께 그도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도 가정 안정적인 물가를 유지했다고 평가를 받는 전두환 정부 당시 물가정책의 실무책임자가 바로 그였다. 당시 물가정책국장의 자리에 그가 앉아 있었던 것. 이후 경제기획국장, 차관보, 대외경제조정실장 등 1980년대 경제 정책의 핵심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의 경제사상의 중심에는 '소비자'가 자리잡고 있다. 그의 '소비자 중심주의'는 물가정책국장 당시 그가 주도해서 전면 개정한 '소비자 보호법'은 읽는 핵심코드이다.

"지금도 제가 가장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소비자 제도를 정립했다는 것이에요. 그 때까지만 해도 소비자를 먼저 염두에 둔 정책이라기보다는 생산자를 우선하는 정책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시장경제로 대표되는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소비자가 선택하는 경제입니다. 소비자의 기호에 따라서 생산을 하고 판매를 하면서 경제가 발전하는 것이죠."

소비자에 대한 사랑에 가까운 그의 관심은 한국소비자보호원장 재임시 매일경제에 기고한 「소비자가 선택하는 경제」라는 그의 글에도 나타나 있다. '시장에서 소비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결정하는 우열의 판정은 정치에서의 투표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갖는다.… 무엇보다 정부는 시장의 공정한 경쟁질서를 확립하고 소비자 선택 폭을 확대함으로써 소비자선호와 환경변화에 기업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제구조를 구축해야 한다.(매일경제, 1993. 11. 9.)'

"일본이 90년대 들어서 지금까지 10여 년을 내리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일본의 지성인 중에서 몇몇이 이런 문제를 이미 지적했었지만 대세를 이루지 못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정체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따르지 말아야 할 일본의 이런 모습을 우리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제 2위기가 온다느니 경제가 어렵다느니 하는 말들이 있는데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단순히 경기부양책 같은 것으로 풀어질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본과 같은 구조적인 문제이죠. 그런 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지도자의 리더십(leadership)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그는 소비자보호원장을 거쳐 철도청장, 공정거래위원장을 거쳐 1997년에는 대통령 가까이에서 경제정책을 보좌하는 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나라의 외환위기 가능성이 안에서 축적되고 있던 시기였다. 결국 그 해 말에 가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를 받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이미 제출했던 그의 사직서는 그 시기와 맞물려져 수리되고 말았다.

"그 이후 외환위기 책임론으로 구치소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내가 왜 희생양이 돼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만큼 많이 억울했습니다. 위기라는 게 그렇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한 국가의 경제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아요. 오랜 시간 문제가 쌓이고 쌓여 결국 어느 순간에 터지게 되는 것이거든요. 물론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기에 도의적 책임은 면할 수 없지만 법률적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출 12:5)'라는 말씀을 읽고는 다시 생각을 바꾸게 되었어요. '과연 내가 희생양이 될 만큼 흠 없고 깨끗한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제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게 된 말씀이었습니다."

지금도 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진행 중인 환란과 관련한 법률적, 형사적 책임론에 대해 그는 역사가 판단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30여 년의 공직을 마치고 그는 지금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퇴임하고 현재의 직책을 맡기 전 약 1년여간은 국가경영전략연구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공직에서의 왕성했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민간인 신분이 되어 국가경영에 대한 다양한 정책을 연구하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 기독교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역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책임을 다하려는 그에게 앞으로의 활동을 기대해본다.

"지금 지도층 가운데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높습니다. 국회의원 가운데 ⅓이상이 기독교인이니까요. 어떤 면에서 보면 매우 부끄러운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기독교인이 나라를 위해 할 일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나라가 잘못된다면 그 책임은 기독교인의 것이고, 잘 된다면 기독교인이 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책임이 크죠. 저 자신도 그런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또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깊이 반성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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