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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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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뉴스메이커] 아마추어 최초로 KBS교향악단 지휘한 와이즈인포넷 김인호 회장
주관기관/행사명   한국경영인신문 발행일자   2001/02/15 조회수   0
  "무척 두려웠는데 막상 무대에 오르니 편안해지더군요"


꿈만 같습니다. 충정타워 11층에서 마주앉은 김인호 회장의 소감은 의외로 간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회장은 지난 2일 생애 최고의 경험을 했고 아직도 그 여운이 온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김 회장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꿈을 현실로 옮겨놓은 사람, 아니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오로지 신만 알 수 있는 그런 몹시 충격적이고 신선한 경험이었다며 이리저리 적당한 말들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은 찾지 못하고 처음에 했던 꿈만 같다라는 그 말만 되풀이했다. 그만큼 김 회장은 지난 2일에 가졌던 KBS교향악단 지휘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두려웠지만 막상 무대 위에 오르니까 비로소 편안해지더라"며 환한 미소를 짓는 김 회장의 이색경험과 함께 그가 말하는 와이즈인포넷의 경쟁력과 미래, 국내 벤처산업에 대한 견해 등도 같이 들어보자.


김 회장의 말처럼 그의 KBS 교향악단 연주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교향악단이 생긴 이후 이번에 처음으로 아마추어 지휘자를 무대 위에 올려보낸 KBS의 용기도 용기였지만 어릴 때부터 늘 가까이서 대해온 음악에 대한 정열 하나만 달랑 믿고 어렵게 KBS측의 집요한 협박성 요청을 받아들인 김 회장의 용단도 실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의 지휘능력을 이미 파악한 KBS교향악단은 처음부터 김 회장을 염두에 두고 이번 연주회를 추진했기 때문에 실제로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교향악단측은 김 회장의 계속되는 사양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김 회장을 설득했고 막판에는 자신들의 사전기획설까지 털어놓고 김 회장이 계속 고사하면 부득불 이번 연주회를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압박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 같은 강도 높은 교향악단의 요구를 음악을 사랑하는 김회장도 완전히 뿌리칠 수는 없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머리털 나고 무대에 처음 서는 생초보자가 교향악단 관계자들의 우려를 사면서까지 그들이 선곡해준 쉽고 짧은 곡을 정중히 사양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선택해 아무탈 없이 단원들과 최상의 호흡을 엮어내며 성공적으로 지휘를 끝마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슬라브 행진곡 100번 이상 연습


어렵게 교향악단 지휘를 받아들인 김 회장은 그때부터 자신이 선곡한 슬라브행진곡을 100번 이상 연습한 후 무대에 선다는 계획을 세우고 착실히 연습에 몰입했다. 그는 우선 소장하고 있던 LD음반을 켜놓고 교향악단에서 챙겨준 지휘자용 악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휘자용 악보를 생전 처음 보는 김 회장이 악보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귀로는 음악을 들으며 눈으로 악보를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손도 악보에 따라 쉴새없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는 그가 살아온 수많은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고통의 시간을 한올한올 희망의 시간으로 채워나갈 수 있었다.

"주위에서는 코치를 두고 보다 체계적으로 연습을 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충고했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시간이 짧았고 또 내심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늘 지휘자를 꿈꿔왔고 몇 십 년 전부터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보면서도 항상 손으로는 지휘를 하고 있었거든요. 연예시절에는 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지금의 아내가 무척 당혹스러워 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역시 취미로 음악을 감상할 때 하던 습관성 지휘와 무대에 서기 위해 연습하는 것은 질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 아내가 가장 많은 격려를 해주더군요. 막상 지휘 요청이 들어왔을 때만 해도 저보다 더 많이 반대하던 사람이 지휘를 결정한 후에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된 셈이죠.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지휘를 마치고 내려왔을 때도 물론 아내가 가장 좋아했습니다."

김 회장이 아마추어로서는 국내 최초로 KBS 교향악단의 지휘를 맡아 이를 보기좋게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물론 그의 마음 한구석에 오랫동안 또아리를 틀고 있던 지휘자에 대한 식지 않은 꿈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인은 도전의식으로 무장한 그의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그는 연주회가 열린 그 날까지 그가 선곡한 슬라브 행진곡을 반복해서 100번 이상 청취했고 또 그 이상 손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래서 그는 모 지휘자의 말처럼 국내 음악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매우 의미있는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음악은 균형감각을 길러준다


자신의 계획대로 슬라브 행진곡을 100번 이상 연습한 후 무대에 올라 청중들의 뜨거운 박수세례를 받은 김 회장은 인터뷰 중간에 대뜸 음악과 경영인을 직접 연결시키며 매우 의미있는 음악예찬론을 펼쳤다.

"경영인을 비롯해 국가의 고위정책을 담당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균형감각입니다. 왜냐면 이쪽으로도 쏠리지 않고 그렇다고 저쪽으로도 쏠리지 않는 균형감각을 갖춰야 제대로 자신들이 맡은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최고경영자들을 비롯한 고위공직자들은 음악을 통해 균형감각을 익혀나가야 합니다. 우리 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최고경영자들과 고위공직자들의 잘못된 균형감각 때문에 큰 고통을 당하는지 말입니다. 서로 싸우고 시비걸고 때려서는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고 더구나 사회의 질서를 잡을 수 없습니다."

현 세태에 빗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음악예찬론을 당당히 펼쳐놓는 김 회장은 IMF 사태 얼마 후 현정부에 의해 환란의 책임자로 지목돼 구치소에 들어가 있을 때도 자신은 악보를 보고 지휘를 하면서 그 어려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고 덧붙인다.

사실 김 회장의 애틋한 음악사랑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농민운동가로 더 잘 알려진 부친 김영환 목사는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 선생과는 숭실전문대 동문으로 당시 첼로를 연주한 안익태 선생과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이중주연주회를 개최할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이처럼 훌륭한 음악가적 자질을 가지고 있던 김영환 목사의 핏줄을 그대로 이어받은 김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에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졌고 이같은 뛰어난 자양분이 김 회장의 KBS교향악단 지휘로까지 오롯이 이어질 수 있었다.

특히 김 회장은 유독 정기연주회에 대해 엄청난 애착을 갖고 있다. 그는 외국에 나갈 때면 항상 그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장을 찾는다. 정기연주회가 오케스트라의 꽃이기 때문이다.

"정기연주회는 최고의 협연자와 지휘자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베를린필의 정기연주회를 보는데는 무려 4년이 걸렸습니다. 바쁜 일정에 쫓겨 미리 예매를 하지 않고 무작정 가서 낭패를 당했기 때문이죠."

김 회장은 이같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지난 91년부터 매년 국내 최고의 교향악단으로 평가받고 있는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를 부인과 함께 빼놓지 않고 관람하고 있다. 사실은 이번 지휘도 이같은 김 회장의 식을 줄 모르는 음악사랑과 21세기를 맞아 관객들에게 보다 색다른 연주회를 선사하고자 한 KBS의 뜻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시장으로의 귀환


오랜 공직 생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김 회장은 자신이 현재 택한 길을 그가 공직에 있을 때 그렇게 강조해 온 '시장으로의 귀환'을 이제야 몸소 실천하는 것이라고 일축한다. 지난해 10월 그는 주위의 예상을 완전히 깨고 한 벤처회사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시장으로의 귀환'을 주장하며 아무런 연고나 특별한 인연도 없는 미래형 벤처기업인 와이즈인포넷에서 젊은이들과 미래를 헤쳐나가며 시장으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고 싶다는 속내의 일단을 드러냈다.

와이즈인포넷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자신이 축적하고 있는 여러 가지 소중한 경험들과 지식들을 흔쾌히 사내에 쏟아붓고 있는 김 회장은 요즘 들어 특히 지난해부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벤처산업의 위기진단과 그 활로모색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한동안 벤처붐이 일었는데 그것은 좋게 말하면 우리나라에 벤처를 하기 위한 좋은 조건이 생동했던 기간이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민들의 높은 지식 수준, 단기수익 추구성향, 컴퓨터를 비롯한 인터넷과 이동통신의 높은 보급률, 정부의 적극적인 벤처지원 등은 모두 벤처를 하기 위한 좋은 조건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벤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때 미국이 한동안 일본경제에 밀린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80년대 중반부터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해 새로운 경쟁력을 갖게 되면서 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약 10년 간 경제호황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미국이 구조조정을 해나가면서 새로운 조류를 빨리 흡수하고 그것을 통해 국가경영이나 기업경영이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정연한 논리를 앞세워 벤처산업의 호황기 주요인을 분석하는 김 회장은 미국의 예까지 들어가면서 우회적으로 국내 벤처업계의 구조조정을 더 강력하게 역설한다.

"가령 미국이 그렇게 발전하는데 빌게이츠 같은 사람들의 역할도 물론 중요했겠지만 그들의 역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창의적이고 좋은 아이디어를 언제든지 기업화시킬 수 있고 또 그 기업이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엄청나게 성장할 수 있는 반면 시장에서 나쁜 평가를 받으면 하루아침에 퇴출되는 그런 유연한 사회적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다시 말해 시장경제가 완전히 뿌리내려져 있고 그 시장경제 아래에서 행해지는 정부의 정책이나 제도가 예측가능하기 때문에 오늘의 미국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김 회장은 미국의 예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점은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그 변화를 제도와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김 회장은 덧붙여 "현재의 벤처위기는 이런 사회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은 데 있다"며 지금의 과정을 거친 후 진정한 의미의 벤처산업이 정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국 최고 싱크탱크로 만들겠다."


지난해 10월 와이즈인포넷의 회장으로 취임한 김 회장은 와이즈인포넷을 한국 최고의 싱크탱크로 만들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있다. 그가 공직에서 줄곧 강조했던 이른바 '시장으로의 귀환'을 여기에서 실증적으로 체험해 보이겠다는 것이다.

김 회장이 이처럼 강한 정열을 불태우고 있는 와이즈인포넷은 지난 93년부터 정부기관과 주요 기업들을 대상으로 해외정보와 산업분석자료를 제공해오고 있는 유망 벤처기업이다. 이 회사는 창립 초 한때 다소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고급 정보라는 차별화된 이미지 부각에 성공하면서 성장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료 콘텐츠 판매라는 다소 파격적인 아이템을 과감하게 사업에 접목시켜 유료 정보 제공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 회사는 70여명의 석박사급 연구원이 만들어낸 정치, 경제, 산업, 기술 전 분야에 걸친 약 10만여 건의 고급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있다.

젊은 와이즈인포넷맨들을 잘 추스리며 회사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큰 몫을 담당하고 있는 김 회장은 와이즈인포넷을 "단순한 정보의 수집과 가공판매에서 벗어나 종합 리서치 기관으로, 명실상부한 한국의 싱크탱크로 발전시키겠다."는 강한 포부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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