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우회지 25년 여름호 원고>
전두환 대통령을 위한 변명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 김인호
역대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호감도 조사를 하면 전두환 대통령은 항상 꼴찌다. AI Gemini에게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물어 봤다. 긴 대답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경제적 성과와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낸 긍정적인 측면이 일부 존재하지만,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인권을 탄압하며 불법적인 방식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유지했다는 점에서 그 과오가 훨씬 더 크게 평가된다. 특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책임은 그의 통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의 근거로 남아있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전두환 정권은 권위주의 시대를 마감하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국민들의 투쟁을 더욱 강화시킨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두환 대통령의 재임 기간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경제 성장의 빛과 민주주의 탄압의 그림자가 동시에 드리웠던 시기로 기억된다.」
그런데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는 재임기간에 성장·물가·국제수지라는 경제정책의 3대 목표를 한꺼번에 달성한 대통령이었다. 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한 마리의 토끼도 제대로 못 잡아 절절 매는 판에 그는 3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은 것이다, 그런데도 희한한 것은 이같이 경이로운 업적을 쌓았음에도 그만큼 국민들에게 인기 없는 대통령은 일찍이 없었다는 점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공(功)과 과(過)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매우 분명하게 나뉘고 있지만 국내적으로는 물론, 월스트리트 저널의 평가를 제외하고는 국제적 평가도 대체로 부정적이다.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이런 국내외 평가가 과연 정당하고 편견 없는 것인가?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긴 시간을 거쳐 결국 역사를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기에 이 분에 대한 평가를 이 시점에서 단정적으로 하는 것은 시기상조일지 모른다. 또 필자가 역사적 평가의 일익을 담당할 정도의 전문가도 아니다. 다만,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과정과 재임기간에 정부의 실무 과장과 국장으로서 업무상 그를 가까운 곳에서 비교적 편견 없이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필자가 관찰한 범위 내, 경제 관료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한 범위 내에서 기억을 더듬어 정리하여 이 글을 쓴다. 앞으로 바른 역사의 정립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근거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집권과정의 불법성, 둘째, 5.18사태에 대한 책임론, 셋째는 친인척 관리의 실패, 정치자금 수수, 정경유착, 부정부패 등이다.
첫째,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과정의 불법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성공한 쿠데타를 당시 법률로 재단하여 합·불법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쿠데타라는 것은 당시 법체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과정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 쿠데타에 대한 평가는 오로지 그가 집권 후 보인 통치 치적을 통해 역사의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비록 말년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통치 능력의 한계를 드러낸 측면이 있지만 집권의 전 기간을 통해 한국경제를 건설하고 산업화를 달성하고 무역입국의 기초를 닦아 오늘의 한국경제의 기반을 만든 ‘한국경제의 건설자’가 되었다. 설사 정치적으로 그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그의 경제적 업적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정치적으로 그는 독재자라고 비난 받았고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무력혁명으로 집권한 사람이 독재 안 한 사람을 세계사에서 찾아 볼 수 있나? 온 세계의 최고의 정치지도자들이 한결같이 박대통령의 치적에 찬사를 보내고 ‘그가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 한국경제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칭송하는 것은 그들이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어서 그러할까?
문제는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과정이 군사혁명이었냐에 대한 해석이다. 이견이 많겠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의 집권과정은 전체적으로 군사혁명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가 스스로 그의 집권과정을 군사혁명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기존의 법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었다고 설명하는 데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는 사실과 다르고 또 그 자신이나 그가 이끈 정부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설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력혁명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해야 그의 집권과정이 설명될 수 있고, 더하여 그가 군사 쿠데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당시 역사적 현실이었는지? 가정해서 소위 3김(金)에 의해 한국정치가 계속 좌우되었다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지,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고 정부를 인수해 이룩한 통치 실적과 비교될 수 있는 결과가 이루어졌을까 라는 관점에서 편견 없이 검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군사혁명이라는 최후의, 최악적 과정에 대한 충분한 유예를 전제로 하고서 말이다. 그래야 성공한 쿠데타를 통한 그의 집권기간 동안의 치적이 쿠데타의 불법성을 능가할 정도의 것이었는지에 대한 편견 없는 역사적 평가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5.18 사태에 대한 당시 정부의 책임이나 이에 대한 전 대통령 개인의 책임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고 아마도 많은 부분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역사의 평가에 맡겨져야 할 사안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끝까지 5.18 사태에 대한 정치적, 사법적 단죄가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았고 그 개인의 책임론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특히 소급입법에 의한 ‘5.18 특별법’의 제정으로 단죄되었지만 법리상 ‘소급입법 금지’라는 법치주의의 대원칙인 동시에 우리 헌법의 명문규정을 벗어나 이루어진 이 소급입법으로 인한 법치주의의 후퇴, 그리고 이것이 그 이후 나라의 사법제도 운영의 왜곡에 미친 영향 여부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역사적 평가에 의해 최종 마무리 돼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셋째. 친인척 관리의 실패와 정치자금 수수, 정경유착 등 부정부패의 측면은 전 대통령의 가장 비난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되고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전두환 대통령의 긍정적 평가는 주로 경제적 측면에 집중된다. 여기에 더해 사회질서의 안정과 유지, 문화적 측면의 치적, 복지와 사회보장제도의 발전에 기여한 점 등이 부가된다. 우선 전 대통령의 경제적 업적을 본다. 전두환대통령이 실권을 잡은 1980년, GDP성장율은 -1.6%, 소비자 물가상승율은 28.7%에 달했다. 물론 경상수지는 적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실업율은 5.2%에 달했다. 국가신용도가 낮아 해외차관 도입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를 운영하여 우선 당시 모두 불가능하다고 본 한자리 물가안정 목표를 달성했다. 그것도 낮은 한 자리다. 집권 말기에는 0% 수준의 물가를 이뤘다. 비로소 한국경제는 국제 경제사회와 get along 할 수 있는 경제가 됐다. 이 과정에서 채택된 공무원봉급 동결, 추곡수매가격의 최소화 등은 정치인으로서는 결단하기 매우 어려운 인기 없는 정책이었다. 전 대통령 아닌 그 누구도 결행하기 어려운 정책이었다. 오늘 날 까지 대체로 유지된 한국의 재정 건전성은 바로 이런 정책적 결단의 역사적 산물이다. 지금 대통령 되겠다고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는 정치인들을 보라. 더하여 높은 성장, 국제수지의 흑자도 달성하였다. 전 대통령의 집권말기와 노태우 대통령의 집권 첫 해인 1986년부터 1988년 까지 한국경제 연평균 12.1%의 성장을 달성했다. 1986년 최초로 46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한 이후 1989년까지 누적 흑자액 340억 달러를 기록했다. 소위 ‘세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상, 거시지표 차원에서가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운용이 갖고 온 한계, 내지 초래하는 문제점, 즉 시장원리와 괴리되는 지나친 고도성장의 추구, 중화학과 농어촌 부문에의 과잉투자, 팽창적 기업경영 행태라는 후진 내지 중진국 형 경제운용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이를 시장을 바탕으로 하는 자율과 안정이라는 선진국 형 경제로 성공적인 전환을 이룩하는 것을 대통령으로서 그의 경제적 사명으로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점을 들어야 한다. 비로소 한국은 국제적 시각에서 볼 때 정상적인 경제운영이 가능한 나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오늘의 한국경제는 없을 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의 경제치적도 반감되었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경제적 치적은 박 대통령의 그것에는 못 미치더라도 그것을 결과적으로 보완하여 한국경제를 완성한 업적으로 평가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전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집권 초기 경제에 대한 지식이 거의 백지 상태였지만 탁월한 참모들을 기용, 활용하고 그들의 조언을 수용하여 경제를 운영하였고 확고한 신념, 강한 자신감, 그리고 탁월한 리더십으로 어려운 과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동안 스스로 ‘경제대통령’으로 자부할 정도의 경제적 지식도 갖추었다. 이 과정에서 쿠데타 적 방식으로 집권한 그, 독재자라고 비난 받던 그가 가장 자유적이고 시장경제 원리를 신봉하는 경제학자와 경제관료 들을 중용하고 그들의 전문적, 애국적 진언을 받아드려 경제체제의 전환과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은 특기할 만 하다고 하겠다. 어쩌면 아이러니다. 지금도 회자(膾炙)되는 그가 그의 최고의 경제참모 김재익 수석에게 했다는 말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는 그의 자신감, 시장경제에 대한 확신, 참모를 절대 신임하여 일을 맡기고 그로부터 최고의 헌신을 유도하는 용인술을 엿보게 한다. 역사상 이런 말을 한 독재자가 또 다른 데에 있을까? 경제적 측면에서의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임기 중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가 저조했다는 등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경제정책은 결국 선택의 문제다. 모든 것이 다 좋은 정책은 없다. 이렇게 물가안정을 추구하는 과정, 재정건전성을 추구하는 과정은 불가피하게 추가적인 재정투자에 신중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결과 아니겠는가? 물가안정도 달성하고 사회간접자본 투자도 충분히 하는 요술방망이는 경제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그 당시 시점에서 보다 중요했었는지 의 문제다.
그는 재임 중 서울이 88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도록 했고 완벽한 개최 준비를 해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노인복지법, 아동복지법, 장애인복지법, 유아교육진흥법 등 여러 사회복지 관련 법안이 그의 재임 중 제정되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어쨌건 우리 고령자들이 큰 혜택을 보고 있는 65세 이상 노인 지하철 무임승차제도의 도입도 그의 재임 중 이뤄졌다. 야간통행 금지 해제, 중·고등학교 교복 자율화, 프로 야구, 프로 축구 등 스포츠 산업의 활성화가 이뤄져 사회 유화조치와 대중문화의 진흥에 기여한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경제적 업적 못지않게 그가 한국 정치발전에 기여한 업적을 빼놓을 수 없다. 첫째는 ‘단임 약속’의 실천이다. 그가 정식 대통령으로서 7년 임기를 시작하면서 ‘단임’을 국민에게 약속했지만 사실은 아무도 그가 그 약속을 지키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임기 말이 가까워 올 때 언론조차도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금기 사항으로 치고 보도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군더더기 말 한마디 없이 그 약속을 지켰다. 세상에 군사혁명 지도자로서 집권한 대통령이 단임을 약속한 사례가 있는지?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지킨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다.
그 뿐 아니라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 들였다. 대통령의 선출권을 국민 전체에게 되돌려 준 것이다. 사람들은 이 선언을 당시 노태우 후보가 한 걸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 주역은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런 결단할 정도의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 대통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사실일 것이다. 요즘 대통령이 되겠다고 별 수단을 다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전두환 대통령에게 쉐쉐! 해야 되지 않을까? 그가 아니었더라면 한국의 직접 민주정치의 부활이 그렇게 일찍 가능했을까? 물론 그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또 다른 많은 피가 흘렀을 것이다.
필자는 당시 정부에서의 직책 때문에 그를 가까이에서 아주 자주 관찰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정치지도자로서 또한 인간적 면모도 부분적으로 나마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필자가 지근거리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본 것은 그가 1980년 9월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에 따른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의 보선을 거쳐 제 11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였다. 당시 필자는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 물가총괄과장이었다. 그날 그는 당시 신병현 경제부총리, 서석준 상공부장관, 김수학 국세청장을 새벽 일찍 청와대로 호출했다. 알고 보니 약식 물가장관회의였다. 필자는 진념 물가정책국장과 같이 신 부총리를 수행하여 회의에 배석했다. 진국장이 당시 영국 경제협력관에서 귀국하여 물가국장을 맡은 지 일천하여 업무 파악이 안 돼 있었기 때문에 관행에 맞지 않게 과장인 나도 배석을 하게 된 것이다. 전 대통령의 첫 인상은 말을 듣기보다 본인이 말하기를 더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대통령으로서는 치명적인 결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또 대통령이 개별 가격 하나하나까지 챙기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물가정책 운영이 매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날 이후 나중에 필자가 물가국장을 3년간 맡아하면서 그의 최우선 경제정책 목표인 물가안정을 실무적으로 책임지면서 매분기 1회 이상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하는 등 잦은 관찰 기회를 가지면서 그 분에 대해 내가 가진 종합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과장 때 첫 배석 시 가졌던 우려는 기우였다. 임기가 지날수록 말수를 많이 줄이는 대신 보고를 경청하면서 꼭 필요한 지시만 하고 업무도 세부적인 실무사항 보다 큰 틀의 정책 방향을 주로 챙기는 스타일로 바뀌어 갔다. 임기 말이 될 때쯤에는 정말 대통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진화하는 대통령이었고 인간적으로도 깊은 친화력을 갖고 있었고 명석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분기마다 직접 현안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국가 최고통치자인 전두환 대통령의 생각이나 행동을 지근거리에서 듣고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의 집권 과정 등을 보면서 당연히 초기에는 속으로 큰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보고를 자주 하면서 그분의 인간적 매력과 리더십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주요 정책 사안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나 결단을 미루는 행동, 문제가 생겼을 때를 예상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보고를 할수록 업무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다. 훌륭한 점이 많이 발견되었다. 전 대통령은 특히 친화력이 대단했다. 집무실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인사를 하려고 하면 이미 알고 있다는 표시를 했다. 보고를 끝내고 나갈 땐 등을 두드리며 “김 국장, 잘해 줘”라는 등 격려를 빠뜨리지 않았다. 나중에 차관보가 되어 더 자주 보고를 하게 된 노태우 대통령과 비교해서 인간미가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한마디로 전두환 대통령은 바깥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명석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취임 초기와는 달리 점점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보다 주로 보고를 경청하는 쪽으로 바뀌어 갔다. 그랬기에 재임 중 갈수록 유능한 대통령의 면모를 더욱 갖추어 갔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대통령 취임 직후 과장으로서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서 전 대통령의 많은 말을 들으면서 가졌던 생각이 근본적으로 수정되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상 언급한 공(功)과 반대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에게 비난 받아야 할 과(過)도 많지만 국내외 언론과 민심은 그의 명백한 공(功)까지도 깎아내리는 데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세 마리 토끼를 잡은 성과도 그 당시 세계 경제의 3저(低) 현상 덕분이지 그가 잘 해서 그런 결과가 초래된 것이 아니라는 말도 많이 한다. 당시 3저 호황이 있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대외 여건을 경제성장, 물가안정, 국제수지 개선에 효율적으로 활용한 것은 경제적 치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왜 다른 나라 정치 지도자들은 똑 같은 국제경제 여건을 활용하지 못해 월스트리트 저널의 평가와 같은 말이 나왔을까?
그의 단임 결단이나 대통령 직선제로의 복귀도 당시 정치, 사회 환경이 이를 불가피하게 했고 그의 자발적 결단이라고 볼 수 없다는 말도 한다. 당시 필자는 KDI 파견 국장으로서 2000년 장기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하면서 향후 정치 안정 여부를 가름할 이 문제에 대한 전 대통령의 결단을 주시한 적이 있기에 이 결단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결단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필자는 ‘국가운영이 진정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위해 그 시점에서 대통령으로서 해야 될 사명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부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지 모르지만 이 기준에 적합한 분이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이란 데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같이 할 것이다. 여기에 굳이 한 사람을 추가한다면 전두환 대통령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