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우회지 23년 겨울호 기고> 외환위기에 대한 이해와 오해 김 인 호(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 Ⅰ. 시작하는 말 “외환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진행형이다”, “「의도되지 않은 축복(blessing in disguise)」이나 「역사가 준 선물」이 될 수도 있었던 이 위기에서 한국과 한국경제는 진정 유효한 교훈을 얻지 못했다”, “한국경제가 끊임없는 「위기의 재생산구조」 속에서 헤매는 것은 이 위기를 겪으면서도 이를 교훈으로 삼아 한국경제의 구조개혁의 기회를 만드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실패의 배경에는 이 위기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부족 또는 오해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말들은 흔히 「6.25이후의 최대의 국난」이라고 하는 외환위기에 대해 당시 그 중심에 있었던 사람의 하나인 필자가 평소 가지고 있는 생각을 몇 마디로 정리한 것들이다. 외환위기가 발생한지 26년이 다가오는 지금 새삼 이 위기에 대한 그간 잘못된 인식을 불식하고 바른 이해에 접근해야 할 필요를 필자는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것은 이 위기가 일부 우리 사회가 즐겨 묘사하는 ‘6.25 이후 최대의 국난’으로 그치고 당시 서울대 이면우 교수가 위기 직후 쓴 「신창조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위기로부터 적절한 교훈을 얻음으로써 오히려 「역사가 준 선물」이 나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당시 깡드시 IMF총재가 이야기한 「의도되지 않은 축복(blessing in disguise)」이 될 수도 있었던 좋은 기회를 놓치고 한국경제가 끊임없는 위기의 재생산 구조에 머물게 된 데 대한 우리 사회의 깊은 반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997년 말부터 시작한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는 통상의 외환·금융 위기에 머물지 않고 경제 전반의 위기로 확대 심화되어, 온 국민과 국민경제를 최악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왜 그렇게 전개되었을까? 다음해 초부터 다양하게 전개된 위기의 책임 규명 과정은 결과적으로 파행으로 끝났다. 왜 그렇게 됐을까? 이렇게 고통을 겪고도 우리 사회는 위기로부터 유효한 교훈을 얻는 데 실패했다. 왜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을까? 이상 세 가지 물음에 적절한 답을 얻어야 우리는 외환위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이를 수 있다고 필자는 믿고 이 글을 쓴다. 적어도 우리 사회가 ‘지적인 사회’라면 OECD가 이야기한 바 있는 지적접근의 4 요소에 의하여 위기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과 책임론, 그리고 대응방향이 채택되었어야 한다. 첫째,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 위기의 본질 내지 성격(Know What) 둘째, 문제가 왜 생겼나: 위기 발생의 배경과 원인(Know Why) 셋째,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위기에 대한 대응과 극복방안(Know How) 넷째, 문제는 누구 때문에 생겼으며 해결은 누가 할 것인가: 위기 발생의 책임론과 위기극복 과정에 참여해야 할 사람(Know Who) 그러나 외환위기의 진행이나 극복 과정에서 한국사회와 정부가 걸은 길은 전연 달랐다. 선점된 고정관념이나 편견, 또는 정치적 목적을 떠나 진실을 구조적으로 밝히려는 국가적인 노력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정부 차원의 제대로 된 보고서 하나 나온 적이 없다. 위기의 본질과 위기 발생의 배경과 원인을 편견 없이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위기 발생으로부터 자유로운 계층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당시 집권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소위 ‘환란주범론’에 따라 일부 관료와 기업만을 희생양으로 삼고 정권유지나 인기관리에 필요한 정치인, 노동자, 농민, 언론, 각급 지식인들에게 전부 면죄부를 주어 버렸다. 온 국민에게 책임의식을 불러 일으켜야 개혁에 동참할 터인데 이 모두를 스탠드의 구경꾼으로 만들어 버렸다. 위기의 수습 당시 국가지도자는 스스로의 책임을 인정하는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떤 도덕적 기반을 가지고 온 국민의 책임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위기 규명을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 즉 감사원의 특감, 검찰의 수사와 기소, 재판, 국회의 청문회 등은 그 수순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집권자의 의도에 맞는 연출만 이루어짐으로써 진실규명은 포기된 채 엄청난 국력낭비의 장이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아직도 이 역사적 사건의 진정한 배경, 본질과 전 진행과정의 실체가 우리 사회에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는 이 글을 쓰는 기회에 필자가 경험하고 생각한 범위 안에서 외환위기에 관한 모든 것, 특히 사회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에 대해 이해가 없이는 외환위기의 전모, 진실에 대한 파악, 이해가 될 수 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외환위기는 단순한 경제적 사건이 아니다. 당시의 정치 상황과 국가지도자를 비롯한 관련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국내외 사람들(key players)의 생각, 행태, 관계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제까지 외환위기를 설명하는 많은 기록이나 자료 중 어떤 것도 이 부분에 주목하여 기술한 것이 없다. 미흡하지만 이 글에서 부분적으로 그런 쪽으로 시도를 함으로써 위기의 본질과 실체가 좀 더 제대로 규명되고, 이제라도 우리 사회의 이해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필자 개인에게나 한국경제에 있어서나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생각하는 이 위기로부터의 교훈을 우리 사회가 늦게라도 얻는 데 일조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Ⅱ. 외환위기의 배경과 본질 외환위기 전모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위기의 배경과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전제조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일반화 돼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잘 못된 인식을 바로 잡고 올바른 이해를 하는 데서 시작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1. 달러가 부족해서 위기가 온 것이 아니고 위기가 와서 달러가 빠져나간 것이다. 흔히 ‘달러(외환) 부족’을 위기의 본질로 본다. 그러나 달러가 부족해서 위기가 온 것이 아니고, 위기가 왔기 때문에 달러가 빠져나가 부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외환위기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마치 백제 멸망의 원인을 계백장군의 황산벌 전투의 패배에서 찾으려는 것과 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계백이 황산벌 전투에서 져서 백제가 망한 것인가? 아니면, 백제가 이미 망하게 돼 있었기에 계백이 그 전투에서 진 것인가?’ 위기는 ‘외화유동성 위기’의 형태로 왔지만 그 배경에는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사회, 특히 국제금융사회의 신뢰의 추락이 있었다. 즉, 1997년 98년에 걸쳐 우리 경제에 닥친 위기의 본질은 ‘신뢰의 위기’였다. 왜 국제금융사회는 한국경제에 대해 그때까지 보여 왔던 ‘믿음’을 거둬들인 것일까? 이를 규명하는 것이 위기의 배경과 원인을 밝히는 첫 걸음이 돼야 한다. 2. 외환위기 자체는 국가부도나 재정위기가 아니고 기업과 금융의 위기였다. 그때의 위기 가능성, 이를 극복하기 위해 IMF의 지원 금융을 받은 것을 우리 사회는 흔히 ‘국가부도’라고 한다.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엉터리 영화를 만들어 국민인식을 오도한 사람들도 있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식이다. IMF에의 구제금융 신청은 이 위기가 국가부도로 발전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우선 그때의 부도 가능성은 기업과 금융의 부도 가능성이었지 국가 또는 재정의 부도 가능성이 아니었다. 이것이 우리의 금융위기가 남미 국가들이 겪은 위기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그때까지 남미 국가들의 위기는 대부분 재정위기로부터 시작됐다. 정부의 적자재정이 위기의 주요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위기 직전까지 재정이 지극히 건전했다. 특히 선거의 해인 1997년에도 재정 흑자를 기록했고, 다음해 재정증가율을 3퍼센트 수준에 머물도록 안정적인 예산안을 편성하려고 했다. 나중 국회에 제출된 예산안은 4퍼센트의 증가율로 편성됐다. 그러나 선거를 앞둔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예산안이었다. 그래서 당시 강경식 부총리와 필자는 야당보다도 여당 정치인들로부터 “선거에 지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것인가?”라고 심한 공격을 받았다. 당시 공공부분의 외채는 크지 않았다. 더욱이 당장 상환 대상이 되는 단기채는 전연 없었다. 문제가 된 외채의 대부분은 기업과 금융기관의 빚이었다. 기업과 금융기관이 부도 위기에 몰렸을 때 최종적으로 스스로 국제금융시장에서 재원을 조달하여 빚을 갚을 수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이것이 막혀 버렸다. 결국 금융기관과 기업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은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보유외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대부자(lender of the last resort)인 한국은행이 기업과 금융기관이 죽더라도 모르겠다고 했다면 보유외환이 빠져나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으로 보유외환을 풀어서 어려움을 구제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보유외환이 빠져나간 것이다. 정부의 책임은 이러한 방만한 기업과 금융의 누적된 문제점에 대한 깊은 문제인식을 갖고 문제가 축적되기 전부터 지속적인 감독을 소홀히 해 온 것, 그리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능률적인 금융감독 체계를 진작 만들고 운용하지 않은 것에 있다. 바로 이것이 당시 ‘금융개혁의 당위성’, 외환위기 진행의 결정타가 된 ‘금융개혁의 좌절’이 갖는 의미다. 3. 위기는 외환•금융 위기에 그치지 않고 IMF체제 하에서 경제전반의 위기로 발전했다. 이것이 우리 국민들이 필요 이상의 고통을 겪은 진정한 이유다. 그 원인과 과정 등이 제대로 밝혀진 적이 없다 그 첫 단계는 우리나라가 총 584억 달러라는 위기 수습에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엄청난 자금을 IMF와 다른 국제기구, 주요 선진국들로 부터 지원받기로 했고, 또 그 일부가 바로 들어오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외환시장의 불안정이 가라앉지 않고 계속 증폭되어 간 이해되기 어려운 현상이 발생했다. IMF에의 지원 요청과 결정은 그 자체로 투자자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고 따라서 빠른 시일 내에 환율이 안정되어 가는 것이 통례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면 IMF 지원을 받으면 대체로 한 달 내에 외환시장과 환율의 안정이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 앞서 IMF 구제 금융을 받은 멕시코, 태국, 인도네시아 들이 다 그러했다. 그러나 유독 우리나라는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오히려 환율이 급상승하였고, 국가신용등급도 급격하게 추락하였다. 결국 우리나라의 경우 IMF 자금지원 요청과 지원 결정이 투자자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불안감을 주는 등 국제 금융사회의 한국에 대한 신뢰가 오히려 더 추락하는 결과로 나타났던 것이다. 다음으로 IMF 체제에 들어간 이후 필요 이상으로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대량의 실업이 발생하면서 경제가 당초 IMF와 합의한 성장 목표 3%보다 무려 10% 가까이 낮은 –6.7%까지 하락한 것은 구조조정과정에서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만 IMF로부터 우리의 실정에 맞지 않는 초 고금리와 초 긴축재정을 주 내용으로 하는 거시경제 운용방향을 요구 받고 이를 잘못 수용하여 정책운용을 한 점 등 다른 요인에 기인한 것이다. 거시 경제운용에 대한 IMF측과 당시의 우리 정치권과 협상책임자들의 인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IMF체제 초기에 거시경제 운영을 잘못함으로써 우리 경제가 필요이상 과도하게 위축되고 그 결과 무수한 기업이 도산하고 높은 실업이 발생했다는 지적은 국내에서는 이미 1998년 3월 남덕우 전 총리에 의해 그 가능성이 지적되었지만 국제적으로도 1998년 12월에 세계적으로 저명한 경제학자인 IBRD의 Stiglitz 부총재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그 이후 대부분의 권위 있는 국내․외 경제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가 되었으며 1999년 4월에는 우리 정부도 워싱턴 G33재무차관회의에서 당시 정덕구 재경부 차관에 의하여 발표된 ‘한국보고서’를 통하여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결국 IMF는 서로 다른 병을 가진 환자들에게 똑같은 처방을 했다. 구제 금융을 하면서 재정이 파탄 나 위기가 초래된 중남미 국가들에게 요구한 내용과 같은 요구를, 상황이 전연 다른 우리나라에도 한 것이다. 후에 IMF 스스로도 그때 강요한 정책이 잘못됐다고 공식적으로 시인했다. 외환위기 후 김대중 정부 때 구조조정 정책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이헌재 전 금융감독원장도 2001년 3월 ‘우드로 윌슨 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IMF의 초기 대응을 비판하면서 “재정의 위기가 아니라 기업 부채에서 비롯된 위기인데도 재정의 긴축을 권고함으로써, 정작 퇴출시켜야 할 기업을 죽이지 못하고 살려야 할 기업을 오히려 고사케 했다”고 솔직하게 회고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가 맞은 외환위기가 유동성 위기에서 출발하여 경제전반의 위기로 증폭된 데는 정밀한 분석을 요하는 많은 요인이 국내·외적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인들에 대한 균형 있는 규명 노력이 전연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이를 밝히려는 노력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4. 위기는 ‘6.25 이후의 최대의 국난’으로 그치고 이를 「역사가 준 선물」로 만드는 데 실패했다 어느 개인이나, 사회, 국가도 위기로부터 적절한 교훈을 얻으면 위기의 경험은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기의 본질이나 성격, 그리고 발생의 배경과 원인에 대한 편견 없고 균형 있는 분석이 선행되고 이 바탕위에서 합리적인 대응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부터 무려 26년이 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위기에 대한 우리 사회와 역대 정부가 가졌던 기본적인 인식이나 대응방법은 이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필자는 지금 한국경제는 진정 큰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원인은 경제 이전의 사상적, 정치적 측면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경제적 측면에만 국한하더라도 지나간 외환위기로부터 제대로 된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 가장 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만약 그랬더라면 오늘날의 위기적 상황을 우리경제가 겪고 있지 않을지 모른다. 외환위기 이후, 10여 년 전에 우리가 겪었던 글로벌 금융위기도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모질게 겪었다. 이런 의미에서 외환위기는 한국경제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위기이다. 현재 진행형이다. Ⅲ. 위기의 복합적 성격 : 구조적/상황적, 국내적/국제적 요인들 외환위기는 일시에 발생하지 않았다. 위기는 유동성 위기의 형태로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국내외로 축적된 구조적 문제와 연계해 진행 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단기간에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또 왜 그 시점에 위기가 왔느냐? 그때 외환위기가 안 왔다면 영원히 안 올 수 있었던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다. 그때 아니면 그 후에 왔을 것이고, 지금 오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외환위기 도래의 배경과 원인은 한편으로는 구조적 요인과 상황적 요인,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적 요인과 국제적 요인을 종합하여야 분명히 밝혀진다. 위기 도래의 필연성,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것이 구조적 요인이며, 왜 그때 그 시점에 발생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상황적, 환경적 요인이다. 이를 메트릭스 구조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국내적이고 구조적인 대표적 요인은, IMF가 구제금융 조건으로 요구한 ‘4대 부문’의 개혁과제다. 국제적이고 구조적인 요인은 ‘IMF체제’의 한계로 설명된다. 국내적이고 상황적인 요인으로는 연쇄적인 대기업의 부도 발생도 있지만 그해가 바로 대통령선거의 해로 선거 결과 구성될 정부의 성격과 정책방향에 대한 불안 등 정치적 불안정성이 극히 높아졌다는 점이 지적돼야 한다. 국제적이고 상황적인 요인으로 대표적인 것은 동남아 외환위기의 파급 영향이다. 다음의 표는 필자가 위기 도래의 배경과 원인을 위의 관점에서 발생 직후 정리한 것이다.
(표) 97 외환위기의 배경과 원인 위기의 형태 : 외화유동성 위기 위기의 본질 :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의 위기
| 거시경제운용 | 구조적 요인 | 환경적, 상황적 요인 | 국내 적 요 인 | 1. 경제운영과 기업 경영의 고성장 체질 ⇒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 ⇒ 단기채 위주의 외채구조 | 1. 시장에 대한 정부역할의 부적합 2. 한국 특유의 대기업 구조와 행태 3. 금융제도의 낙후, 도덕적 해이 4. 노동시장의 경직성 | 1. 한보부도 이후 월1건 꼴로 대기업 부도발생 2. 대통령 선거의 해 정부 지도력의 한계 노출 (기아사태 처리, 금융개혁법안의 국회 통과 실패) 대통령 선거 결과 구성될 신정부의 성격과 정책방향에 대한 불안 3. 11/19 개각에 따르는 문제점 | 국 제 적 요 인 | | 1. 금융자본의 세계적인 축적 1일 1.5조$의 금융자본 이동 2. 금융산업․금융시장의 global한 통합 3. 정보통신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4. 변동환율제와 국제금융자 본의 도덕적 해이 ⇒IMF체제의 한계노출 | 1. 동남아 타국의 외환위기의 파급효과 (일본경유) 2. 서방 투자가들의 Asia 시장, Asia 경제, 경영의 효율성에 대한 전반적 신뢰 저하 ⇒ 태국사태를 계기로 공황심리로 확산 3. Washington Consus, 음모론(?) 등 |
Ⅳ. 위기의 이해를 위한 정치경제학적 접근의 필요성 1997년 외환위기 도래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1997년이라는 해의 정치적 의미에 깊이 주목해야 한다. 대통령선거 전후에 전개된 정치적 상황, 그리고 이를 주시하고 있던 국제사회의 인식이 외환위기의 발생과 진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구체적으로는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씨의 경제에 대한 사고체계나 만약 그가 당선될 경우 그 정부가 채택할 경제정책 방향에 대한 국제 금융사회의 불안감이 점증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위기와 관련한 사안에 대한 그의 발언이 잦아질수록, 위기적 상황은 가속화 되었다. 기타 주요 국가지도자들과 위기의 발생과 진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요 인사 들 (key players)의 행태도 위기와 관련 깊은 관계가 있었다. 위기의 구원투수 IMF 역시 그 긍정적 역할만 가졌던 건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외환위기는 이 모든 것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포함하는 정치·경제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비로소 그 참모습에 접근할 수 있다. 이 부분을 깊이 있게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지면이 필요하기에 이 기고에서는 생략한다. 관심 있는 독자는 필자의 회고록 「명(明)과 암(暗) 50년 : 한국경제와 함께」 Ⅱ권 외환위기의 중심에 서다 중 123p 이하 또는 필자의 홈페이지 http://www.ihkim.org ⇒ 외환위기자료실> 강의/강연/기고 > 기고 중 ‘4.외환위기’를 참고해 주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