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동정란
HOME > 동정란
 

제목    나의 음악사랑 인생
주관기관/행사명   예우회지 24년 여름호 발행일자   2024/05/31 조회수   0
 
<예우회지 24년 여름호 기고>

나의 음악사랑 인생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

1.  음악과 나

내가 음악듣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마도 집안 배경과 종교적 영향 때문일 것이다. 아버님이 상당한 음악적 소질을 갖고 계셔서 그 옛날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서 공부하실 때 바이올린을 하셨다. 당시 동기생인 첼로 전공의 안익태 씨와 2중주를 하신 기록이 있다. 교회의 예배에는 항상 찬송가를 부르니 우리 가족은 모두 조금은 음악적 분위기에서 유년·학창 생활을 지낸 셈이다. 그 영향인지 나를 빼고 3형제가 다 음악에 약간의 소질을 나타냈다. 4형제 중 제일 위인 큰 누님은 피아노를 했고, 작은 누님도 피아노에 더해 풀룻도 좀 했다. 형님은 미국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여 서울공대 음악과를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나만 특별히 들어낼 것이 없었다. 어떤 악기도 하지 않았고 그 흔한 학창생활의 합창단이나 교회의 성가대도 한 적이 없다. 그저 음악을 좋아해서 듣는 것 이외의 어떤 소질도 외부에 표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타고난 음감은 꽤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쉬운 곡들은 계음으로 귀에 들어온다. 나와 음악과의 관련은 혼자서 음악을 듣는 것 즉 감상이 전부다.
 
사무관 때인 70년대 초 미국 시라큐스 대학 유학 중에는 어떤 날 도서관에 가서 공부는 안하고 음악도서실(music library)에서 헤드폰을 끼고 좋아하는 곡의 여러 종류 음반을 다 가져다 비교해서 들으면서 하루 종일 지내고 온 적도 있다, 당시는 LP 시대였다.
소위 ‘환란주범’으로 몰려 구치소에 있을 때 음악을 좋아하는 나의 생활습관이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됐다. 헨델의 ‘메시아’, 베르디의 ‘레퀴엠’을 비롯한 좋아하는 종교음악의 full score들을 비롯하여 한국 가곡집, 오페라 아리아집 등을 구해 넣어달라고 해서 지휘를 하는 기분으로 읽고 속으로 노래하면서 이 어려웠던 시절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적도 있었다. 찬송가를 다 들쳐 나의 애창찬송가 15개를 고른 것도 이 때였다.

기회가 있을 때 연주회장의 객석을 찾는 것은 우리 부부의 다소 사치스런  취미생활이었다. 나는 1992년 환경차관이 되면서 EPB때에 비해 좀 시간의 여유가 생겨 KBS의 연중회원으로서 일 년치 정기 회원권을 구입하여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월 정기 연주회를 찾기 시작했다. 이후 20여년을 계속하다가 중간에 KBS교향악단이 경영상 문제로 스케줄을 펑크 내는 등 최악의 상황에 이르러 정기권을 환불하는 사태가 나기까지 계속됐다. 최근 다시 재개하고 있다.

2001년 수지의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큰 맘 먹고 장만한 오디오 세트는 변변한 물건 하나 없는 우리 집으로서는 재산목록 제1호다. 그간 국내외에서 틈틈이 모은 판이 제법 많다. CD 천여 장, DVD 삼백여 장, 옛날 시카고 근무시절 모은 LP 천여 장을 가지고 있다. 음악 애호가 들 중에도  LP판을 버린 사람이 많지만 나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고 자주 듣는다. 다소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원음에 가장 가까운 음향을 들을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서 여유시간이 있을 때 대체로 이 세트와 판을 통해 음악을 듣지만 차 안에서나 사무실에서도 음악을 많이 듣는다. 독서를 하거나 원고를 쓰거나 자료를 읽는 등 일을 할 때도 음악을 들으면서 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정신이 집중되고 능률이 오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을 때에는 다 덮어 놓고 특히 좋아하는 곡을 크게 틀어 놓고 한 두 시간 듣는다. 이때는 아파트에 살다보니 아래윗집 때문에 오디오의 볼륨을 놓고 항상 신경전을 벌이는 아내의 강력한 항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작년 12월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혼자 지내면서 음악을 좋아하는 나의 취미가 혼자 사는 외로움을 많이 줄여주고 있다. 음악회는 혼자 가야되는 다소의 어색함을 감수하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간다. 다행이 주변에 음악을 좋아하는 이웃과 후배가 있어 같이 하는 경우가 많다. 
 

2. 두 번에 걸친 교향악단 지휘

이런 내 인생에 음악과 관련하여 전혀 뜻하지 않은 두 번의 큰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2001년 2월 2일 저녁 여의도 KBS홀에서 있었다. KBS 교향악단의 「새봄의 교향악」이란 이름의 특별 연주회는 문자 그대로 특별한 연주회였다. KBS교향악단으로서는 50년의 긴 역사에 처음으로, 그것도 전혀 검증되지 않은 아마추어에게 지휘봉을 맡긴 엄청난 모험과 나의 어쩌면 터무니없는 객기가 합해서 만든 사건이었다.
나는 그 날 아마추어로서 그 연주회 프로그램 중 한 곡인 차이코프스키의 ‘슬라브 행진곡’을 지휘했다. 이름이 행진곡이지 full orchestra가 연주하는 전형적인 단 악장의 관현악곡이다.

전통적으로 KBS교향악단은 우리나라 최고의 교향악단이다. 당연히 이 교향악단은 국내외의 최고의 지휘자를 상임이나 객원으로 초청 지휘봉을 맡긴다. 그러니 음악하고는 전연 인연이 없고 딱딱한 경제 분야 공직(公職) 외길로 수 십 년을 살아온 사람으로 알려진 김인호란 사람이 갑자기 이 저명한 교향악단의 지휘봉을 잡게 됐다는 사실은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정부에서 나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환란 주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느라고 언론에 얼굴이나 이름을 많이 내고 있던 때였다.

「김인호 전 경제수석 KBS교향악단 지휘 맡아」, 「김인호 전 경제수석 KBS 신년 음악회 지휘」,「김인호 전직경제수석 지휘자로 ‘화려한 외도’」등은 연주회 이틀 전부터 국내 거의 전 언론(연합통신, 6개 종합 일간지, 2개 경제지 등)들이 이 사실을 큰 뉴스로 다루면서 뽑은 제목들이다. 기사들은 내가 아마추어로서 KBS교향악단을 지휘하게 된 배경과 그 의미, 이렇게 된 과정, 필자의 음악인생, 음악관 등을 상세히 기술하는 등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원래 이 연주회는 KBS가 동 교향악단의 연중 정기회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개최한 신년 특별 음악회였다. 클래식 음악의 저변확대를 위해 좀 특이한 이벤트로서 꾸미기 위해 회원 중에서 아마추어 한 사람을 특별 지휘자로 초청하여 한 곡의 지휘를 맡기도록 구상된 연주회였다. 

나는 KBS측의 이런 구상에 공감했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많은 망설임과 주저, 교향악단 측의 집요한 권유, 그리고 수차례에 걸친 거절과 사양 등 우여곡절을 겪어 이 제의를 수락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도 모르지만 스스로는 혼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쌓은 지휘 실력을 한 번 테스트해보고 싶은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잠재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외국의 경우 아마추어에 의한 교향악단 지휘가 그렇게 생소한 것이 아니다. 이 경우 대개 사회 저명인사인데 영국의 히스(Edward Heath) 전 수상이 London Symphony Orchestra를 지휘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또 우리나라에서 성남 아트센터 개관기념 연주회에서 지휘한 적이 있고 이제는 고인이 된 미국의 길버트 카플란(Gilbert Kaplan)이란 사람은 금융전문지 Institutional Invest를 창립하고 운영한 CEO였지만 아마추어 지휘자로서 말러의 교향곡 2번‘부활’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꼽혔고 이 한 곡만 가지고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의 대부분을 객원으로 지휘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아마추어가 정규교향악단을 지휘한 예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부부는 거의 20년간 계속해서 KBS교향악단의 정기회원권을 구입하여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월 정기연주회를 찾고 다른 연주회의 경우도 비교적 자주 객석을 찾는 편이었지만 오케스트라의 지휘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구경의 대상이었고 나는 진짜 지휘봉은 한 번도 만져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필자가 지휘대에 선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잘 아는 친구들조차도 깜짝 놀라면서 믿기 어려워한 것은 전연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기야 음악을 들으면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 손을 흔들면서, 때로는 튀김용 젓가락을 지휘봉 대신 쓰면서 지휘자 흉내를 내는 나를 수 십 년간 보아 와서 나의 지휘 실력을 어느 정도 아는 유일한 사람인 아내조차도 처음 교향악단 측의 이 제의를 받고 수락 여부를 상의하자 “당신, 제 정신이오?”라고 펄쩍 뛰면서 극구 만류했을 정도였다. 

결국 수락을 하고 ‘슬라브 행진곡(March Slave)'을 곡목으로 선정한 후 본격적인 혼자만의 연습이 시작됐다. 우선 집에 있는 디스크 중 마음에 드는 판을 골랐다. 그것은 유진 올만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LP판이었다. 이 판을 카세트테이프의 앞뒤로 들어가는 대로 반복 녹음을 해서 집에서, 차 안에서 시간 있는 대로 들으면서 악보를 보고 소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다 보니 내가 그 때까지 제법 음악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은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많은 연주회를 다녔지만 악기 하나하나의 음색, 음의 높낮이 차이, 악기별 배열 등 정확히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유명한 지휘자가 지휘한 것을 비디오로라도 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찾기 시작했다. KBS는 물론 웬만한 음반가게 전부를 뒤져 보았지만 어쩐지 이 곡은 비디오로 나와 있는 것이 없었다. 생긴 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체념했다. 이러다 보니 시간이 너무 촉박했지만 그 상태에서 수 십 번 반복 연습하고 나니 어느 정도 될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를 이틀 앞 둔 날부터 연주 당일 오후의 리허설까지 세 번 KBS교향악단과 연습 및 조율하는 기회를 가졌다. KBS교향악단의 방음 장치된 연습실에 섰던 연습 첫 날 기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백 명에 가까운 단원들의 신기해하는 눈초리들,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떻게 지휘를 하나 보자는 듯한 묘한 표정들의 단원을 앞에 두고 딸이 사 준 진짜 지휘봉을 들고 처음으로 손을 들었을 때의 그 떨리는 기분은 참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마지막 리허설에서 당시 연주회의 객원지휘자로 내가 지휘한 곡을 제외한 다른 곡들을 지휘한 박은성 한양대 교수(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역임)는 자기는 전문 지휘자인데도 초기에는 지휘대에서 막상 지휘봉을 잡으면 몹시 떨렸는데 나는 아마추어로서 의외로 너무 태연하다고 코멘트를 했다. 그러면서 아마 내가 공직을 통해 청중 앞에 나가서 이야기하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분야는 다르지만 훈련이 돼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낸 태연함 뒤에 내가 느꼈던 그 초조함, 그리고 떨림, 흥분을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2001년 2월 12일 KBS방송에 나타난 KBS교향악단을 지휘하는 필자]
    
결과적으로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아마도 KBS교향악단 역사상 가장 많은 청중이 모인 실내 연주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좌석이 없어서 2층 복도까지 꽉 차게 앉은 엄청난 청중 그리고 연주 결과에 대한 열광적 반응으로 KBS의 모험과 나의 객기의 합작품인 이 작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내가 지휘하는 십 여분 동안 내내 너무 초조해서 손이 꽁꽁 얼었다는 아내도 청중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면서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고 한다.

KBS는 이 연주회 전 프로그램을 녹화해서 세 번에 걸쳐 방영하기도 했다. 연주회가 끝난 직후는 물론 한 동안까지도 나는 그 때를 생각하면 고조되는 감정을 느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한 때는 그때의 연주장면을 아내와 비디오로 보면서 “참 겁도 없이 일을 저질렀지?”라고 하면서 웃음 짓곤 했다. 연주직후 한동안은 5년은 젊어진 것 같은 기분으로 지냈다.
          
아쉬운 것은 KBS가 당초 구상한 것과 같이 이런 식의 아마추어 회원이 부분적으로나마 지휘나 연주에 참여하는 특별 연주회를 매년 개최하려던 계획은 그 이후 실현되지 않고 있다. 적절한 사람을 찾지 못해서가 아닐 것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클래식 음악 애호가의 저변을 확대하면서 관객층을 넓히려는 경영적 마인드가 우리 KBS교향악단에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국영기관이 갖는 경영 효율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 사건 이후 나는 꽤 음악을 아는 사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심심찮게 인사를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러다가 다시 지휘를 하는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던 나에게 또 한 번 자연스럽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기회가 왔다.

두 번째 사건은 나의 무역협회 회장 재임 시 있었다. 2016년 7월 창립 7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기념연주회를 개최했는데 그 연주회에서 내가 두 곡을 지휘하는 이벤트였다. 무역협회가 1946년에 설립되어 나의 회장 재임 중인 2016년에 70주년을 맞게 되어 다양한 기념행사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 하나가 기념음악회였다. 협회 행사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협회가 강남구에 소재하기 때문에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를 초빙하기로 했다.


[2016년 7월 15일 무역협회 창립 7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강남심포니를 지휘하는 필자]


우리 직원들이 회장이 한두 곡을 지휘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었는데 의미 있는 행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해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케스트라도 그 결정을 환영했다. 곡의 선정과정에서 2001년에 KBS교향악단과 했던 슬라브행진곡을 또 하기는 그렇고 해서 베토벤의 교향곡 2번의 2악장을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는데 오케스트라와의 조율과정에서 그 곡은 조용한 분위기고, 현악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축제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었다. 또 
그 곡 연주 중에는 많은 관악 연주자들이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그 전후에 연주되는 곡과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할 것이니 풀 오케스트라가 동원되는 대형의 다른 곡 중 예컨대 바그너의 
로엔그린의 3막의 전주곡 같은 곡으로 하면 자기가 그날 지휘할 다른 곡과의 조화도 잘 돼 좋겠다는 성 지휘자의 의견이었다. 

나도 잘 아는 이 곡을 다시 들어보니 분위기에도 맞고 내가 좀 연습하면 할 만 하다고 생각됐지만 좀 짧아 모처럼 하는 지휘의 대상 곡으로서는 좀 아쉬울 것 같아 다른 곡을 모색했지만 갑자기 전혀 새로운 긴 곡을 선정해서 연습하기에는 너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전에 했던 슬라브행진곡을 다시 하되, 틀림없이 앙코르 요청이 있을 것이니 앙코르곡으로 이 곡 즉 바그너의 로엔그린의 3막의 전주곡을 하는 것으로 했다. 

나는 당시 고질인 허리 병이 다시 도져서 심지어 걷기도 어려울 정도였지만 용케 무대를 걸어 나가 포디움에 서서 지휘를 할 수 있었다. 연주 중 지휘봉을 잠깐 떨어뜨렸다가 다시주어 지휘를 계속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기념 연주회는 전체적으로 성공적이었고 특히 내가 지휘한 두 곡은 기대에 못지않게 많은 박수를 받았다. 역시 언론에서도 상당히 비중 있게 이 사건을 다루었다. 

결국 나는 2001년 KBS 교향악단을 처음 지휘한 이후 15년 만에 다시 강남심포니를 지휘하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이 두 번의 이벤트는 나의 음악사랑 인생의 클라이막스라고 하겠다.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아마추어로서 정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나의 기록을 깬 사람은 없다. 


3. 음악듣기를 즐기며 살아온 생활을 통해 느끼는 소회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특히 나라의 중요한 일을 하는 공직자나 정치인, 고위 경영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은 균형 감각이라고 본다. 전문성도 필요하고 일에 대한 열정이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균형적 사고가 결여된 전문성, 일에 대한 집념은 때로는 독선과 아집, 편견으로 이어져 오히려 사회에 해가 되는 경우도 많다.

나의 경우 살인적 스케줄과 업무에서 오는 중압감, 때론 매우 어려운 인간관계 속에서 영위한 장구한 공인생활에 있어서 음악에 대한 나의 사랑은 이 모든 삭막한 생활에 있어서 윤활유,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 음악에 대한 나의 사랑과 관심은 자칫 독선적이고 경직된 사고와 생활방식에 빠지기 쉬운 공적 생활에 여유와 관용, 균형 감각을 가져다 준 청량제의 구실을 내게 해 주었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과중한 업무에서 오는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남에 대한 이해의 마음이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이런 마음은 균형적 사고로 이어질 것이다. 소도 젖을 짤 때 좋은 음악을 들려주면 젖이 풍성하게 나온다고 한다.

더욱 각박하고, 살벌해지는 우리 사회가 보다 따뜻해지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침 없이 균형 있는 시각으로 우리 모두가 사회의 현안 문제를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평소 소망이다. 좋은 음악을 좀 더 많이 듣는 분위기가 되면 그런 사회를 앞당기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클래식 음악을 고집할 생각은 없다. 우리 국악, 현대음악, 크로스오버 다 좋다.

다만 나는 클래식 그 중에서도 종교음악에 좀 더 심취할 뿐이다. 흔히 클래식은 너무 어려워서 처음에 취미를 붙이기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나 전문가가 되려는 것이 아니고 즐기기 위한다면 조금만 관심을 갖고 열심히 들으면 금방 좋아지게 된다고 말하고 싶다. 나와 오랫동안 같이 지낸 운전기사가 있었는데 전연 음악에 문외한이었던 이 사람이 항상 클래식이 흐르는 나의 차를 운전하면서 빠른 시간에 나 못지않게 클래식 애호가가 되어 가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느낀 생각이다.

우리나라 같이 많은 부모들이 어린 자식들에게 적성이나 취미에 관계없이 피아노를 비롯한 악기를 하도록 하는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더라도 취미로라도 악기를 계속해서 하거나 최소한 음악을 듣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나라도 드문 것 같다.
나는 우리 젊은 부모들의 음악에 관한 생각, 자식들에 대한 음악 교육방법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평소 가지고 있다. 음악 자체를 특히 듣는 것부터 즐기는 것을 자식들에게 가르쳐 주는 방향으로 말이다. 요즘은 음악 감상에 큰 도움을 주는 해설서 중에는 직업 음악가 보다 오히려 아마추어 음악 애호가들이 쓴 책들이 많다. 나는 이런 아마추어들이 쓴 음악 해설서들을 많이 읽으면서 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욱 넓혀 왔다.

특히 인생의 장을 열어가는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이 좋은 음악에 접하는 기회를 좀 더 많이 가지면 젊어서부터 훨씬 부드럽고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게 되고 더욱 풍성한 삶을 살게 되리라고 믿는다. 한편 인생의 노년을 보내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좋은 음악에 접하는 기회를 좀 더 많이 가지면 여생이 보다 풍성해지리라고 생각한다. 
또 과중한 업무 부담과 스트레스를 받는 우리 공직자들이 좋은 음악에 많이 접하게 되기를 권유하고 싶다. 각박한 중에서도 인생을 즐기면서 보다 균형 있는 시각으로 나라 일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교향악단과의 특별한 관계는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살던 차에 나는  2019년 4월 뜻밖에도 한국의 최고 챔버오케스트라인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Korean Chamber Orchestra : 약칭 KCO)의 후원회장을 맡게 되었다. 하던 사람도 그만 두어야 할 나이에 여러 가지로 적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사양했으나 악단 측의 요청이 하도 진지해서 그만 수락을 하고 말았다. 거의 유일한 국제 수준의 이 오케스트라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심을 하면서 최소한의 역할을 해오다가 최근에 사임했다.

요즈음도 KCO, KBS교향악단을 비롯한 오케스트라들의 연주회에 시간 허락하는 대로 참석하고 있다.  아내와 같이 여생을 좀 더 많은 시간을 음악과 같이 하려고 구입 20여 년이 지난 오디오 시스템을 작년에 대대적으로 손을 보고 upgrade했기에 아내와 같이 하지 못하는 아쉬움 속에서도 음악 감상을 위한 여건은 더 좋아졌다. 집에 있는 그 많은 CD, LP, DVD 판 중 제대로 충분히 듣지 못했던 것을 한 번씩 만 들어도 죽을 때까지 다 못 들을 지도 모른다. 그에 더해 요즘 YouTube를 통해 어떤 음악도 들을 수 있고, 클라식 전문 TV채널도 여러 개 있으니 소스는 무궁무진한 셈이다. 시간과 열의가 한정이다. 
나의 음악사랑 인생의 제2의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기분이다.
 
첨부파일       파일 다운로드 예우회지 24년 여름호(24.5.31).hwp예우회지 24년 여름호(24.5.31).hwp
관련문서